류중일(48)은 탁월한 선수였고, 코치였다. 슈퍼스타는 아니었지만 재주 많은 유격수, 톱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11년간 삼성 코치로 지내면서 수비·주루 분야의 전문가로 활약했다. 국가대표팀도 항상 그를 불렀다.
류중일이 훗날 감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사람 좋고, 자기 일에 성실한 전형적인 참모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2011년 명문구단 삼성의 지휘봉을 잡았다. 감독이 됐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류중일은 그대로 류.중.일이었다. 대신 류중일의 삼성은 지난해보다 강해졌다. 솔직담백하고 부드러운 리더, 류중일이 부임 첫 해 삼성을 챔피언에 다시 올려놨다.
①'훔쳐내기'의 달인
②소통, 화통, 그리고 야통
③안 보이는 리더가 최고다
그의 첫 멘토는 김재박(전 LG 감독)이다. 그가 경북고 2학년 때였던 1981년 어느 날. 한국화장품 야구팀이 경북고에서 훈련할 기회가 있었다. 1977년 실업야구 7관왕을 차지한 김재박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류 감독은 "정말 깜짝 놀랐다. 수비할 때 핸들링(포구)이 너무 좋았고, 공 던지는 감각도 최고였다. 내 첫 번째 멘토는 단연 김재박 감독님"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대구중 시절 TV 속 김재박을 보고 흠뻑 매료됐다. 류 감독은 "세 번 놀랐다. 1번타자로서 기습번트를 성공한 뒤 2루에 도루하는 장면, 유격수로서 3-유간 깊은 타구를 잡아 노스텝으로 1루로 송구하는 장면, 경기 후반 마무리 투수로 나와 상대 타자를 잡아내는 장면 등이다"라고 말했다.
류중일은 김재박이 되고 싶었고, 비슷하게 따라갔다. 호타준족의 유격수로서 '제2의 김재박'이란 소리를 들었다. 경북고 3학년 때는 마무리 투수도 잠깐 했다. "뛰어난 마무리였느냐"는 질문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며 웃었다.
프로에 입단해서는 고(故) 장효조 2군 감독을 쫓아다녔다. 아마추어 시절 썼던 알루미늄 배트와 프로에서 사용하는 나무 배트의 타격법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타격의 달인'에게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 했던 것이다.
1999년을 끝으로 현역 은퇴한 후 초보 코치가 돼서는 조범현 당시 삼성 배터리 코치를 괴롭혔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쏟아냈다. 조범현 전 KIA 감독은 "류 감독과 룸메이트였는데, 자려고 하면 질문하고 다시 자려고 하면 또 질문을 해서 잠을 많이 설쳤다"고 회상했다.
코치 11년 동안 그는 모두의 부름을 받았다. 김용희(2000년)-김응용(2001~2004년)-선동열(2005~2010년) 등 역대 삼성 감독은 물론이고, 김경문(2008년 베이징올림픽)-김인식(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조범현(2010년 광저우아시엔게임)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류중일을 원했다. 수비와 작전, 주루까지 모두 능통한 코치는 그가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류중일의 가장 큰 스승은 지난 7년간 보좌했던 선동열 전 감독(현 KIA 감독)일 것이다. 보고 들은 것도 많고, 물려받은 유산도 적지 않다. 젊은 타자들과 최강의 불펜진이 그렇다.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류 감독은 "선 감독님에게서 배운 건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류 감독의 최고 장점은 자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오만, 자신이 항상 옳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끊임 없이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동경했고, 장점들을 하나씩 훔쳐냈다. 그리고 결코 그들을 뛰어넘었다고 자만하지 않았다. 그의 야구에 여러 색깔이 섞인 이유다.
그의 눈은 항상 무언가를 훔쳐냈다. 감독이 된 뒤에도 그의 입에서는 "선배에게 배웠다"는 말이 계속 나왔다. 류중일인 단지 모방자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도전자이기도 했다. 류 감독과 삼성에서 2년(1993~94년)간 함께 뛴 적이 있는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류중일 선배를 부드럽고 착하게만 보면 오산이다. 현역 때 단체 수비훈련이 끝나고 혼자서 따로 공 한 박스(약 200개) 분량을 받았던 선배다. 그냥 받은 게 아니라 타구마다 방향, 스핀, 속도를 모두 다르게 해서 받았다. 당시 그런 시도를 한 선수는 한국에 없었다. 독하고 또 영리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