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별명으로 불리며 사랑받았던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 이을용(35·강원)이 정든 축구화를 벗었다. 23일 강릉종합경기장에서 열린 대구 FC와의 정규리그 29라운드 경기를 끝으로 14년 프로 이력을 마무리지었다.
이을용의 축구인생은 꽤 드라마틱했다. 강릉상고(강릉제일고의 전신) 시절 알아주는 유망주로 불렸지만 정신적 방황을 이기지 못해 1년간 축구와 인연을 끊었다. 나이트클럽 직원·배관공·건설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실업팀 철도청에 복귀해 극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부천 SK에 입단하며 프로 무대를 경험했고,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트라브존스포르(터키)에 입단해 유럽파로 거듭났고, FC 서울을 거쳐 고향팀 강원 FC의 창단 멤버로 참여했다.
은퇴 당일 이을용은 평소처럼 시크했다. 여느 때처럼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팀 미팅에 참여했고, 팀 동료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를 마친 뒤 팬들이 보내는 박수와 환호 앞에서 특유의 냉정함과 차분함은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그동안 강원도 축구팬들이 보내주신 성원 덕분에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하는 이을용의 목소리는 한 없이 떨렸다. 눈가에는 이슬이 촉촉히 맺혔다.
오전 7시30분
이젠 마지막이 될 클럽하우스에서의 아침식사. 하지만 이을용은 내색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몇 가지 반찬을 곁들여 적당한 양의 아침식사를 했다. 인사를 건네는 동료들에게 차분하지만 밝은 표정으로 응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을용은 자기 관리의 스페셜리스트로 불렸다. 간혹 안정환(다롄 스더) 등 절친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도 있었지만, 시즌 중에는 철저히 몸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식사도 훈련도 정해진 스케줄에 따랐다. 이을용의 생활방식은 팀 동료들에게 늘 귀감이 됐다.
오전 11시
팀미팅을 마치고 후배들과 마주 앉았다. 이을용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내용으로 시작했지만 화두는 자연스럽게 후배들에 대한 조언과 충고로 흘렀다. 이을용은 강원 FC 최고참이다. 그라운드에서는 코칭스태프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뽐냈다.
후배들은 솔직담백하게 핵심을 찔러 말하는 이을용의 직설화법을 좋아했다. 공격수 김영후는 "을용이 형의 따끔한 충고가 그리울 것"이라는 말로 맏형을 잃게 된 아쉬움을 표현했다.
오후 1시30분
대구 FC와의 경기를 위해 선수단 버스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탄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을용은 버스에 오르기 전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비로소 은퇴가 실감이 났다. 늘 그렇듯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길에 팬들이 몰려들어 박수와 환호를 보내줬지만 사인과 사진촬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오후 3시
치열한 공방전 끝에 강원이 대구에 1-0으로 승리를 거둬 경기장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어 진행된 은퇴식은 승리에 대한 환희와 영웅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뒤섞였다. 동료들의 헹가래를 받은 뒤 마이크를 잡은 이을용은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 태석군은 "아빠가 은퇴해 참 좋다. 이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오후 8시30분
경기를 마친 뒤엔 강릉제일고 총동문회에 참석해 가족과 함께 인사를 했다. 이을용은 축구의 고장 강원도 태생이라는 점, 그것도 축구명문 강릉제일고 출신이라는 점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
FC 서울 소속이던 2008년 강원 FC 창단 소식을 듣고 미련 없이 이적을 결심한 것 또한 같은 이유다. 이날 밤 동문들은 지도자로 새 출발하는 이을용을 따뜻한 박수로 격려해줬다.
경기장
대구와의 올 시즌 마지막 홈 경기가 열린 강릉종합경기장 외벽은 이을용 은퇴를 기념하고 아쉬워하는 초대형 현수막으로 뒤덮였다. 팬들 또한 떠나는 이을용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경기 전 만난 강릉의 개인택시 기사 김명렬씨는 "오늘이 을용이 제대하는 날 아니냐"면서 "앞으로 좋은 지도자가 되어 강원도 축구를 키워줄 것으로 믿는다"며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