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톈진의 아시아챔피언스리그 E조 첫 번째 경기가 열린 1일 제주 월드컵경기장. '돌아온 탕아' 오승범(30·제주)은 마음이 무거웠다. 제주가 경기 내용에서 앞서고도 진(0-1)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라운드에 없었다. 본부석 뒷편 관중석 가장 높은 곳에서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만 했다. "다 제 잘 못이죠. 경솔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아꼈다.
오승범이 이날 경기에 뛸 수 없었던 것은 챔피언스리그 선수등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주 전이었다. 그는 박경훈 감독을 찾아가 돌연 팀을 떠나겠다고 했다. 중국진출 기회가 생겼으니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박 감독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새 시즌 오승범의 역할은 막대했다. 지난 시즌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고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한 구자철(22·볼프스부르크)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었다. 박 감독이 "자철이가 없어도 제주는 강한 팀이다"며 자신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활동량이 많고 부지런한 오승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구자철과 짝을 이뤘던 박현범에게 공격적인 부분을 맡기고 오승범이 뒤에서 힘을 보태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박현범-오승범 '쌍범'조합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깨질 판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떠난 사이 아시아챔피언스리그 명단 제출 마감시간이 지나갔다.
하지만 중국 진출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외룡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칭다오 입단이 유력했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구단이었다. 3월 개막하는 K-리그와 달리 중국 슈퍼리그는 4월에 시작된다. 급할 것이 없었다. 결국 초조해진 오승범은 제주로 돌아왔다. 박 감독은 충분한 상의 없이 팀을 떠난 그에게 화가 단단히 나 있었지만 '선수생명을 끊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받아주었다. 제주지역 출신인 오승범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 부었던 변명기 사장도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했다.
오승범은 "어려서부터 해외진출에 대한 막연한 꿈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기회가 사라지는 것 같아 조급했다. 마침 온 유혹에 혹했다. 생각이 짧았다"며 후회했다. 프로 9년차. 제주에서 4번째 시즌을 맞는 그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이다. "감독님과 사장님, 그리고 상처를 준 팬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하나다. '구자철 빈자리가 느껴졌다'는 말이 들리지 않도록 내가 죽을 힘을 다해 뛰는 것이다." 오승범의 장점은 수비력이다. 중원에서부터 상대를 강하게 압박해 위기를 미리 차단한다. 박 감독은 "시즌 첫 경기에서 패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수비가 중요하다. 조금만 더 단단해지면 지난해 이상의 성적도 가능하다. 자철이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보다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승범은 비장한 각오로 6일 부산과 K-리그 개막전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가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을 통과할 경우 8강전 이후부터는 추가 선수등록을 한 뒤 뛸 수 있다.
서귀포=이정찬 기자 [jayc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