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의 그림자가 짙었던 지난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쾌속세대'의 질주는 눈부셨다. 모태범·이상화는 훈련의 고통과 경기의 중압감을 즐겼던 새 세대였다. 앞이 보이지 않던 대한민국은 다음 세대로부터 희망을 찾았다. 그리고 김연아의 연기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세계 최고 히트상품이었다.
지난 겨울 쾌속세대의 열정은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으로 이어졌다. 박태환은 보기 좋게 재기에 성공했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 속에서도 꿋꿋했던 태극 전사들은 광저우에서도 감동을 이어갔다. 손연재와 정다래의 출현으로 팬과 스포츠의 거리는 한 층 좁혀졌다. 한국골프는 여전히 미국과 일본에서 위력을 떨친 한 해였다.
김연아 (20·고려대)-피겨스케이팅
스포츠 팬이라면 2010년 2월 26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피겨 퀸' 김연아는 이 날 프리프로그램에서 150.06점을 기록, 쇼트프로그램(78.50점)을 합쳐 총점 228.56점을 얻었다. 피겨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 기록이다. 빙판 위 여신은 '금메달 연기란 이런 것'이라고 온 몸으로 보여줬다. 현장의 모든 이들이 "김연아에게만 금메달 자격이 있다"고 입을 모을만큼 완벽한 연기였다. 이후 김연아는 '타임지 선정 100인'에 선정되는 등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난 오늘 경기가 끝나고 처음 울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너무 기뻤고 모든 게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죠.” -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확정짓고 난 뒤.
박태환 (21·단국대)-수영
올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박태환은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100m·200·400m에서 금메달을 따 3관왕에 올랐다. 자유형 1500m와 혼계영 400m에서 은메달, 그리고 계약 400와 800m에서 동메달을 땄다. 아시안게임 2회 연속 3관왕이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스타덤에 올랐던 박태환은 지난해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무관에 그쳤다. 이후 슬럼프가 길었다. '스타란 단맛을 너무 일찍 봤다'는 비난까지 일었다. 하지만 멋지게 재기했다. 예전처럼 강도 높은 훈련을 묵묵히 소화한 덕이었다.
손연재 (16·세종고)-리듬체조
손연재는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처음으로 개인전 메달(동메달)을 얻었다. 리듬체조는 전통적으로 동구권 국가 선수들이 강세를 보인다.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무늬만 아시아인 선수들이 메달을 휩쓴다. 동양인 중에는 손연재가 1등이었다. 올해 갓 시니어 무대에 데뷔해 국제 대회 경험이 많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성적이다. 빼어난 외모는 그를 깜짝 스타로 만들었다. 팬들은 그에게 '제2의 김연아'란 별명을 붙여줬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저는 리듬체조 선수예요."
“메달 따고 울 줄 알았는데 어제 너무 울어서 눈물이 안 나오네요.” - 광저우 아시안게임 리듬 체조 개인 종합에서 동메달을 딴 뒤. 손연재는 전날 열린 단체전에서 신수지·이경화 등과 호흡을 맞춰 4위를 기록했다.
김국영 (19·안양시청)-육상
제자리 걸음만 하던 한국 육상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갈 길이 멀어보인다. 김국영은 6월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제64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남자 100m 예선에서 10초31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김국영은 31년 만에 서말구가 멕시코에서 세운 10초34 기록을 깼다. 연맹의 전폭적인 지원 결과였다. 하지만 한국 단거리는 아시안게임에서 결승에 올리지 못하며 다시 한번 좌절해야 했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을 앞두고 희망과 좌절을 함께 맛본 한 해 였다.
“내가 작다고요? 그럼 다른 선수보다 한 발 더 뛰면 되죠. 전 기록이 계속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 6월 육상 남자 100m에서 31년 묵은 한국기록을 갈아치운 뒤 단신의 불리함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자.
최나연 (23·SK텔레콤)-골프
LPGA투어 60년 사상 한국 국적의 선수가 단일 시즌에 '상금왕'과 '베어트로피(최저타수상)'를 동시에 받은 것은 최나연이 처음이다. 최나연은 올 시즌 LPGA투어에서 2승을 한 것을 비롯해 15차례나 톱10에 들며 총 187만1165달러(약 21억8000만원)를 벌어들여 생애 첫 상금왕에 올랐다. 평균 타수 69.87로 최저타수상의 주인공도 그의 몫이었다. 지난해 12월 12위였던 세계 랭킹은 4위까지 치솟았다. 내년 그의 목표는 올해의 선수상과 세계랭킹 1위에 오르는 것이다.
“상이요? 받아보니 좋네요. 내년에도 골프장 나가서 끝까지 잘 치고 싶어요.” -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상금왕과 최저타수상을 받은 소감을 묻자.
김경태 (24·신한금융그룹)-골프
일본남자프로골프(JGTO) 사상 첫 한국인 상금왕 타이틀을 목에 걸었다. 김경태는 총 1억8110만3799엔(약 25억1000만원)으로 2위 후지타 히로유키(일본)를 제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상금왕에 등극하며 일본 골프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지난 2008년 JGTO 조건부 출전 자격을 얻어 일본 무대에 처음 진출한 이후 3년 만에 거둔 값진 결과다. 일본의 10대 골프영웅 이시카와 료(19·상랭랭킹 3위)도 김경태의 폭풍 기세를 꺾지 못했다. 김경태는 내년 JGTO 상금왕 2연패를 벼르고 있다.
김우진 (18·충북체고)-양궁
한국 남자양궁에 '괴물'이 출현했다. 고교생 궁사 김우진은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개인과 단체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예선라운드에서는 1387점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한국 양궁계는 향후 10년간 대표팀을 지킬 재목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언론은 김우진을 '10대 나이에 30대의 뱃살, 40대의 외모, 50대의 여유'로 표현했다. 10대 답지 않은 포커페이스에 두둑한 뱃심은 '타도 한국'을 외치던 중국의 기를 확실히 꺾었다. 이번이 첫 메이저대회였다. 내년부터 본격적인 세계 도전이다.
“군대에서 총 쏴 보셨죠? 감 잡았을 때 연달아 쏘면 잘 맞았을 겁니다. 저는 한 번에 몰아칩니다.” - 소년 궁사들이 경험 부족으로 결정적 순간 실수를 한다고 하자 발끈하며.
이상화 (21·한국체대)-스피드스케이팅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남자 스타는 꽤 많았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처음으로 메달(은메달)을 따냈던 김윤만(37)을 비롯해 이강석·이규혁이 대표적이다. 밴쿠버에서 500m를 제패한 이상화는 사상 첫 스피드 여성 스타 반열에 올랐다. 실력에 단아한 미모, 시원스러운 성격까지. 이상화는 한동안 각종 화보·인터뷰 촬영으로 정신 없었다. 올해 한국여성체육회가 선정하는 제22회 윤곡 여성체육대상 최우수선수(MVP)상까지 거머쥐었으니 어찌 올해를 잊을 수 있을까.
“솔직히 김연아가 더 예쁘고 몸매도 좋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고 봐요.” -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김연아와 자신을 비교해달라고 하자.
모태범 (21·한국체대)-스피드스케이팅
모태범은 올 초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따내며 이름을 알렸다. 금메달 후보로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모태범은 이어진 남자1000m에서 은메달까지 따내면서 새로운 한국 단거리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올 여름 휴가 기간 여행 대신 훈련에 매진한 그는 "운동 선수는 성적을 내야 한다. 노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라며 열정을 드러내 더욱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2011 카자흐스탄 동계아시안게임에서 그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정다래 (19·전남수영연맹)-수영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정다래의 존재를 확인한 팬들은 열광했다. 무명의 선수가 따낸 금메달도 소중했지만, 운동선수답지 않은 성격과 말투에 매료됐다. 정다래는 광저우아시안게임 평형 2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땄다. '얼짱'으로는 알려졌지만 금메달 후보는 아니었다. 맨 먼저 터치패드를 찍자 자신도 놀라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자회견 자리에서 '~합시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인터넷 문어체를 유행시켰다. 동문서답식 '4차원' 대화법도 그의 전매특허가 됐다.
“그 다음 질문은 뭐지? 아, 2012년 런던 올림픽 준비…. 아직 아시안게임도 다 끝난 게 아니라서…. 일단 좀 쉬고…. 쉽시다!” “(울면서)부모님과 동현이 보고싶어요. (동현이가 누구냐 묻자) 다래가 좋아하는 사람요.” - 광저우 아시안게임 평형 2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기자회견 자리에서. '동현'이는 복싱선수 성동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