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모진 고생 많이 했습니다. 운동만 하다가 이런 저런 일을 해본다고 했지만 쉽지 않았죠. 그러나 다행히 아이들은 어느 정도 키워 이젠 조금 안정을 찾았습니다. 다른 일을 하는 동안에도 농구 생각은 머리 속에서 떠날 때가 없었습니다."
고려대 재학 당시 49연승의 신화를 이끌었던 주역. 지도자로 변신해 프로농구 초창기를 이끌었던 사령탑. 올드 농구팬들은 황유하(54)를 이충희에 버금가는 감각적인 슈터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황제는 두 명일 수 없는 법.
이충희라는 걸출한 슈터에 가려 황유하는 그 실력만큼 날개를 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농구에 대한 열정을 식게 만들지는 못했다. 지금도 그는 태평양 건너에서 농구만을 생각하며 다시 날개를 활짝 펼 날을 기다리고 있다.
황유하는 이충희의 2년 선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대학교와 실업팀 모두에서 이충희에게 밀려 활짝 피어보지 못했다. 3점슛이 없었던 시절 이충희는 한 경기에서 62점을 넣을 정도로 불세출의 스타였지만 황유하 역시 슛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81년 존스컵대회 파나마전에서 53점은 당시 대회 개인 최다득점으로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 됐었다. 고려대와 현대 시절 그는 평균 30점을 넣을 정도로 막강 득점력을 자랑했다.
▲아쉬운 불명예 은퇴
프로농구가 출범한 1997 시즌. 황유하 감독은 광주를 연고로 한 나산 플라망스의 초대 감독을 맡았다. 미국 UCLA대에서 2년간 코치 연수를 마치고 막 돌아온 직후였다.
나산은 실업농구 약체였던 기업은행과 산업은행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구성했는데 하위권에서 머물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정규리그 5위를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주요 멤버는 센터 겸 포워드였던 이민형, '이동 스커드 미사일'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상식, 우직한 수비를 자랑했던 김현국 등이었다. 외국인 용병으로는 이버츠와 탤리가 뛰었다.
그러나 97~98(9위), 98~99(8위)시즌에는 하위권에 머물렀고 모기업 나산의 부도와 화의신청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팀은 이리저리 휘둘리고 만다. 급기야 99~00 시즌에 벤처기업인 골드뱅크로 인수되는 곡절을 겪었고 시즌 중반에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되는 불명예를 떠안는다. 후임으로는 고대 동기였던 진효준 감독이 임명됐다.
▲한국이 싫었다
2000~2001시즌 SBS 농구 해설위원을 하기도 했지만 불명예 은퇴의 기억은 그를 몹시 괴롭혔다. 삼성 출신의 구단 고위관계자가 오면서 억울하게 손해를 입었다는 피해의식이 떠나질 않았다. 모기업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다른 팀에서 제의도 있었지만 의리 때문에 딱 잘라 거절했던 그였다. 2001년 중반 준비도 없이 미국행을 결심하고 홀연 짐을 쌌다. 도착한 곳은 LA였다. 혈기왕성할 때였다.
그러나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던 그에게 미국 생활이 쉬울 리 없었다. 모아 놓은 돈도 없었다. 당초에는 1~2년 정도 지내고 돌아가자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한국으로의 유턴은 쉽지 않았다. 레스토랑, 마켓, 일식집 등을 해봤지만 크게 성공한 것은 없었다.
그냥 아이들 교육을 어렵사리 시킬 정도였다. 그나마 하던 일식집도 지난해 말 접었다. 미국 경기가 하향세에 접어들자 운영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미국생활에서 얻은 것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도전 정신과 인간적으로 성숙해졌다는 뿌듯함이다.
▲농구는 인생의 전부
그의 머리 속은 지금도 온통 농구로 꽉 차있다. 몇년째 국내 프로농구(KBL) 시즌이 개막 중일 때는 주말 경기는 물론 평일 경기까지 모두 다 봤다.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이 있으면 빼놓지 않고 꼭 참관했다. 최신 작전이나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미국 대학농구(NCAA) 자료도 꼼꼼히 수집해왔다. 지도자로 복귀할 기회가 있을 때 활용하기 위해서다.
열정이 식지 않은 것은 그만큼 아쉬움이 커서다. 85년 현대에서 은퇴할 때도 주위의 만류가 심했지만 그는 지도자로서 대성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이대로 은퇴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허재, 강동희 감독 등 40대 중반이 사령탑에 오르는 등 국내 프로농구 감독의 연령이 낮아지는 추세이지만 그는 50대 초반이 40대 중반과 경쟁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자질을 막 꽃피울 연령대의 사람들을 자꾸 밀어내는 풍조에도 할 말이 많다.
황유하 전 감독은 최근 국내 농구의 흐름에 대해 "큰 선수들이 (외국인 선수들 때문에) 자꾸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파워를 길러 골밑 패턴 위주의 경기를 많이 해야 한다. 또 나 자신도 감독 시절에는 다혈질로 이름을 날렸지만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보니까 너무 성적에 얽매여 심판에 대한 항의가 도를 넘는 것 같다. NBA에서는 억울한 상황이 있어도 한국 만큼의 항의가 통용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황유하 프로필
- 생년월일 1955년 3월 22일생
- 신체조건 184㎝ 76㎏
- 학력 중앙초-숭일중-신일고-고려대(75학번)
- 경력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79년 현대(현대중공업→현대건설→현대전자) 입단 85년 은퇴 85~94년 여자농구 한국화장품 코치·감독 94~95 여자농구 현대산업개발 감독 97년 남자농구 나산 플라망스 초대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