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천연색 파라솔, 비키니 수영복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늦여름 섬 백사장은 스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진정한 섬 여행 마니아는 바로 이럴 때 섬을 찾는다.
온 바다가 다 내 것이다. 산이 있는 섬이라면 그 이상이다. 산 위에서 굽어보는 바다는 한층 깊은 맛이 있다. 트레킹을 위해 섬으로 떠나는 역설의 발걸음도 그 때문이다.
목포에서 시속 60㎞ 쾌속선을 타고 달려도 4시간이나 걸리는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可居島). 아주 옛날 '가히 아름다운 섬' 가가도(可佳島)로 불리다가 1세기 전 '가히 살만한 섬' 가거도(可居島)가 되었다고 한다.
불과 100년 전에서야 사람이 살 만 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외진 섬인가를 짐작케 한다. 그래도 가거도 1구부터 3구까지 세 마을에 사는 인구는 총 500가구나 된다. 으리으리한 리조트는 없지만 모텔·식당·낚시배 등 먹고 자고 놀고 갈 만한 것들은 다 갖추고 있다.
폭염 속에 찾은 가거도, 배로 4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황해와 서해, 중국과 한국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연중 습한 공기를 밀려온다는데, 특히 8월의 대기는 여객선에서 내리자마자 여행자의 땀구멍을 흥분시킨다.
가거도 1구 앞 대리항에 대한 첫인상은 울릉도의 도동항이나 홍도 선착장보다 훨씬 안락해 보였는데, 마을을 품고 있는 회룡산(269m)과 독실산(639m) 덕택이다. 산 정상에 기암괴석이 우뚝 솟은 회룡산과 짙은 상록수림이 밀림을 이룬 독실산은 지독하게도 외딴 섬 가거도에 신비의 벨벳을 덮어씌운다.
고깃배를 빌려 십수명이 함께 타고 둘러본 섬 해안선 22㎞는 한반도 국토 어느 곳보다 인상적이다. 금강산 만물상 못지 않은 해안 기암괴석과 화산 섬의 비치를 보는 듯한 재빛 백사장, 섬 어디에서나 어른 주먹만한 자연산 홍합을 따는 해녀들까지. 가거도의 물산와 볼거리는 4시간의 배 멀미를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가거도 관광(觀光)은 보통의 여행자에겐 여의치 않은 곳이다. 무엇이? 아직까지 섬 안에 유람선이 한 척도 없어 섬 일주에 나서려면 15만~20만원을 주고 배를 빌려야만 한다. 배를 안 타면 뚜벅이로 가능할까?
아쉽게도 울릉도처럼 섬을 여행할 수 있는 일주도로가 아직 없다. 가히 살만한 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여행하기에는 여간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혼자 이 섬을 찾는다면 더욱 그렇다.
●원시의 처녀림 독실산 트레킹
가거도는 아직까지 '가히 놀만한 섬'이 못 되는 것일까? 첫날에 품은 의구심은 둘째날 아침에 해소됐다. 화산섬차럼 가거도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사방팔방으로 줄기를 뻗치고 있는 독실산은 1004개로 이뤄진 '섬 공화국' 신안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발 제로에서 600m까지 뻗은 산이 이런 외진 섬에 솟아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에 가깝다. 독실산 가는 길은 두 갈래다. 마을 뒤편 동쪽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서쪽으로 난 콘크리트 길이다. 아쉽게도 울창한 상록수림을 헤쳐 들어가는 등산로는 수풀이 우거져 길을 찾지 못할 거라고 동네 사람들이 한사코 말린다. 아쉽지만 군부대 보급로로 이용되는 서쪽 능선을 택할 수 밖에 없다.
아침 5시 30분, 예외없이 짙은 안개가 온 섬을 휘감았다. 서쪽 등산로를 따라 독실산을 오르는 이는 기자 말고도 수십명이나 됐다. 서울의 산악회 멤버 37명이 오로지 이 산을 오르기 위해 1박 3일 코스로 찾아온 것이다.
"아무리 산이 좋다지만 여기까지 찾아왔나?"라는 질문이 절로 난다. 강동한설산악회 이구철(60)씨는 "여객선 타고 바다 구경하고, 고깃배 타고 신선한 회도 먹고, 아침 일찍 산에도 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냐"며 "산꾼들 사이에서 입소문은 이미 나 있는 곳이지만 산악회 차원에서 단체 산행을 꾸리기는 우리가 처음일 것"이라고 뿌듯해 한다.
콘크리트로 임시 포장된 산길이지만, 안개에 휩싸인 동백나무, 굴거리나무, 그 밖의 잡목과 수풀이 삭막한 콘트리트 길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바꿔 놓는다. 가거도는 특히 후박나무가 많은데, 예전 이 나무가 약재로 쓰일 때는 전국 생산량의 70%에 달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으면 군부대 앞이다. 산 정상은 이 곳을 통과해야 하는데, 오전 8시 이전에는 들어갈 수 없다. 산 정상에 올랐지만 망망대해를 굽어볼 수 있는 전망은 갖지 못했다.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았다.
독실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 해발 250m 갈림길에서 남쪽 길을 택하면 해안가에 우뚝 솟은 회룡산에 이른다. 마을에서 30분이면 오를 수 있는 해안 트레킹 코스다. 회룡산 정상에 오르니 안개가 걷히고 초록빛 산과 코발트빛 바다, 아담한 어촌 마을과 800m 길이의 방파제 그리고 잿빛 백사장까지 광각 렌즈 안에 쏙 들어온다.
홀로, 외딴 섬의 높은 바위에 올라 발 아래를 굽어보니 술에 취해 물에 취해 호수로 뛰어들었다는 이태백의 풍류가 아니 부럽다. 만물의 조화가 빚어지는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거도=글·사진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가거도 여행 정보
매일 1회 동양고속(061-243-2111,www.ihongdo.co.kr)과 남해고속(061-244-9915)이 번갈아 쾌속선을 운항한다. 요금은 편도 4만 6550원.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1구(대리)에 모텔이 10여 곳 있으며, 1박에 4만원 선이다.
1구에서 걸어서 1시간 걸리는 2구(항리)에 가면 전망좋은 민박집이 많다. 마당에서 섬을 굽어볼 수 있으며, 1구에 비해 훨씬 한적하다. 식사는 모텔에 딸린 식당이나 민박집에서 사먹을 수 있다. 한 끼에 5000원하는 백반이 성찬이다. 패키지상품은 남해안의 섬 지역 전문 여행사 남해안투어(080-665-7788, www.namda.co.kr)에서 판매.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출장소(061-246-5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