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49>
나는 데뷔에서 은퇴까지 3000회를 넘게 경기를 치렀다. 한 경기당 박치기를 10회 정도씩 했으니 수치상으론 3만 회 이상 박치기를 한 셈이다. 난 박치기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지는 멀쩡하다.
사람들 중에는 내가 병마와 싸우다 보니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김일씨가 박치기를 하도 많이 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한다" 등. 심지어 치매 증상이 있지 않는가 묻기도 한다. 이런 질문들은 다 박치기로 인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난 괜찮다. 일간스포츠에 이렇게 나의 삶을 정리하고 있을 정도로 기억력도 생생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지난 과거들이 더 생생히 기억난다.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아픈 기억은 박치기 추억이다.
난 지금도 머리가 쑤신다. 벌이 머리에 들어간 듯 늘 휭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띵하고 속이 메스껍다. 이 같은 증상은 박치기로 인한 후유증이지만 아마도 원인은 머리뼈가 금이 간 까닭일 게다.
난 지금도 머리 만지는 것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 나의 머리를 만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올 초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내가 피곤해 보였는지 누군가 나의 머리를 만지며 지압을 했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머리 아픈 것에 대한 극도의 민감함 때문이다. 난 머리에 그만큼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젊었을 땐 그 예민함도 모른 채 오직 팬들의 요구에 의해 무조건 받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케이블 텔레비젼 채널을 보면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를 종종 방송해 준다. 그 거구의 선수들 중에서 박치기하는 선수는 보지 못했다. 그들도 박치기가 훗날 사람을 골병 들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다.
난 1960년대 초반 이미 박치기 사형 선고를 받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 기절까지 했다. 박치기할 때는 몰랐지만 라커에 돌아오면 골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숙소에 왔는데도 그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머리에선 열도 나기 시작했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수건에 물을 젖힌 후 이마에 올려 주고 또 마사지를 해 주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잤다.
머리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등과 다리까지 아팠다. 처음 박치기 훈련 했을 때와는 아픈 차원이 달랐다. 병원 가는 것을 스승 역도산이 알면 혼날 수도 있었지만 너무 아파 견디기조차 힘이 드니 혼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난 스승 몰래 병원엘 갔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혀를 찼다. "오오키 긴타로씨, 이 몸으로 박치기를 했어요? 당신 박치기 더하면 앞으로 식물인간됩니다. 당장 그만두셔야 합니다."
박치기를 그만두라면 레슬링을 하지 마라는 것과 같다. 그는 내가 왜 박치기를 하면 안되는지 설명해 줬다. 우선 목 뒤쪽 뼈에 금이 갔다고 설명해 줬다. 그것도 한 개가 금 간 것이 아니라 세 개나 금이 갔다는 것. 목뼈에 금이 갔는데도 박치기를 했다는 것은 의학계에서 보고될 만한 사례라고까지 이야기해 줬다.
의사는 "정말 아프지 않았습니까? 당신 정말 참을성이 강합니다"며 자신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유리가 깨지면서 금이 가듯 머리 가운데 뼈도 유리처럼 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가 쪼개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무조건 깁스를 해서 입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고 겁도 줬다. 그 의사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현재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의료진은 나의 머리를 본다. 그리곤 "아니 머리 세 군데 뼈에 금이 가 있는데요"라며 깜짝 놀란다. 돌덩이 머리를 만든 대가가 이렇게 참혹할 줄은 몰랐다. <계속>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