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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일반

[뱁새 김용준 프로의 골프모험] 평생 신념을 위해 헌신한 윌리엄 스왈렌처럼

저절로 눈이 커졌다. 백 년도 넘은 책을 보니. 결국 그 책을 사고 말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책 표지는 여느 고서처럼 짙은 갈색이었다.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속은 찢어진 페이지 하나 없이 멀쩡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책은 나무활자로 인쇄했다는 사실을. 고미술에 조예가 깊은 지인이 귀띔했다. 나무활자로 인쇄한 것이 틀림 없다고. 부드러운 글씨체를 보니 그렇다고 했다. 책 이름은 ‘구약사기’이다. ‘구약’이라면 기독교 성서인 그 구약이냐고? 그렇다. ‘사기’는 무엇이냐고? 역사이다. ‘구약사기’는 구약에 나오는 역사 이야기를 간추린 것이다. 그랬다. 이 책은 초기 한글 기독교 성서였다. ‘조선어’로 번역한 성경인 것이다. 첫 장을 넘기자 출판연도가 눈에 들어왔다. 1921년이었다. 뱁새 김 프로의 조부 김춘식(金春植)옹이 태어난 해이다. 조부는 열 여덟 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격인 전남농업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장가를 갔다. 세상에! 종손이라 대를 잇기 위해 그랬다나? 잠깐! 그 시절에도 나무 활자를 사용했느냐고? 뱁새도 갸웃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성서에 나오는 이름과 지명 따위를 다 담기 위해서는 시중에 있는 금속 활자로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없는 글자를 금세 만들어 채울 수 있는 나무활자를 택했을 것이라고 뱁새는 짐작했다. 출판연도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번역자였다. 번역자는 윌리엄 스왈렌이었다. 조선인이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뱁새는 평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 윌리엄 스왈렌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 무언가 이끌리듯이. 윌리엄 스왈렌(William Swallen, 1859~1954)은 조선 말기에 온 미국인 선교사이다. 조선에는 원래 사과가 없었다. 먹는 사과 말이다. ‘능금’이 사과 아니냐고? 뱁새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능금과 사과는 다르다는 것을. 스왈렌은 한반도에 사과를 처음 전파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사재를 들여 사과나무 삼백 그루를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에서 가져왔다. 그 중 절반은 평양에 심었다. 나머지는 대구 쪽으로 보냈고. 그 사과나무가 퍼져 뱁새가 새콤달콤한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스왈렌은 서울에 있는 숭실대학교와도 인연이 깊다. 스왈렌은 부친에게 상속받은 재산을 당시 평양에 있던 숭실학당에 전부 기부했다. 숭실학당은 이 돈으로 근대식 이층 학교 건물을 지었다. 그것이 평양 숭실중학교가 되었다. 숭실학당은 숭실대학교의 뿌리이다. 스왈렌은 나중에 서울에 터를 잡은 숭실대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고 한다. 스왈렌이 선교사가 된 것은 서른 살이 넘어서이다. 그가 속한 교단은 그를 평양에 파견했다. 그는 북한강원도에 있는 원산으로도 전출을 가서 오래 사역했다. 조선인과 더불어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선어를 깊게 익혔다고 한다. 조선에 온 선교사 가운데 조선어를 가장 잘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성경 번역에 참여한 것이다. 뱁새가 소장한 ‘구약사기’도 그가 번역한 여러 기독교 성서와 한 뿌리이고. 스왈렌은 여든 한 살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0년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정부가 그를 강제 추방한 것이다. 조선인을 수탈하고 핍박하는 일제를 공공연히 비판한 그는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뱁새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다 알게 되었느냐고? 그의 자서전을 미국에서 찾아낸 덕분이다. 그의 딸이 그가 남긴 일기를 자서전으로 펴냈다. 마흔 한 쪽짜리 얇은 책이다. 자서전에는 평양의 한옥과 조선인 모습을 담은 사진도 몇 장 실었다. 고된 육체 노동을 견뎠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가냘픈 스왈렌 부부의 사진도 함께 담았고. 뱁새는 ‘소안론’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가진 그의 삶을 좇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 가슴이 저리기도 했다. 일생을 신념을 위해 헌신한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기쁨이란! 골프 세상에도 비슷한 사람이 있을까? 골프를 골프답게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평생을 땀 흘린 사람 말이다. 고(故) 오의환 전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장 같은 이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대한민국에 골프 규칙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사십 년 넘는 인생을 바쳤다. “규칙 공부 많이 했어”라고 묻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수 년 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골프 심판 교육장을 찾은 것이 뱁새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뱁새에게 프로 골프 투어의 운영을 깊게 가르쳐준 천철호 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경기위원도 그런 사람이다. 마흔 후반에 경기위원이 된 그는 어느덧 칠순이 다 되었다. 묵묵히 골프에 헌신한 많은 이의 이름을 작은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다. 뱁새는 우연히 손에 쥔 책에 얽힌 이야기를 좇다가 자신의 삶도 돌아 보았다. 명예를 좇다가 돈을 좇다가 지금은 골프에 푹 빠진 뱁새의 삶. 뱁새는 앞으로 골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 뱁새가 종교적 편향으로 오늘 이야기를 쓴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은 애독자라면 다 알 것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스왈렌의 후손을 아는 독자가 있다면 꼭 뱁새에게 귀띔해주기 바란다.‘뱁새’ 김용준 프로와 골프에 관해서 뭐든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메일을 보내기 바란다. 지메일 ironsmithkim이다. KPGA 프로 2025.05.21 08:16
생활문화

지붕 없는 박물관, 연천서 열리는 '구석기 파티'

수도권 전철 1호선 상행선을 타고 하염없이 올라가면 노선의 끝에 ‘지붕 없는 박물관’ 연천이 나온다. 1호선 종착역인 연천은 태고의 아름다운 흔적을 간직한 자연과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특히 5월에는 ‘구석기’를 테마로 한 역사문화 축제가 관광객들을 기다린다.시티투어 버스 타고 연천 한바퀴 차 없이도 연천군을 골고루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군이 직접 운영하는 편리한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연천군 시티투어 버스는 연천역에서 출발하며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영된다. 수요일과 목요일은 테마형 코스로 같은 시간대 버스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이 해당 요일 경유 관광지를 함께 관광하며, 동행하는 해설사를 통해 다양한 연천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금·토·일요일은 순환형 코스로 경유 관광지에 하차해 관광한 뒤 다시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해 다른 관광지로 이동할 수 있다. 역시 해설사가 함께 연천군 관광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티투어 버스를 타면 지장봉에서 흘러내리던 계곡물이 주상절리 절벽을 만나며 절경을 이루는 재인폭포, 약 30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돼 매년 구석기 축제가 열리는 연천 전곡리 유적, 임진강 장단석벽의 아름다운 절경을 눈에 담고 해바라기 축제가 열리는 고구려 3대성 중 하나인 호로고루,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날씨가 좋으면 망원경 없이 북한 주민을 볼 수 있는 태풍전망대까지 방문 가능하다.연천군 시티투어 버스는 온라인 예약을 통해 이용할 수 있으며, 잔여석에 한해 현장 매표도 가능하다. 연천군 관계자는 “디지털 관광주민증에 가입한다면 다양한 혜택도 받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디지털 관광주민증은 인구 감소 지역의 관광 활성화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진하는 사업으로, 2025년 3월 기준 가입자 14만명을 돌파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어플을 이용하여 가입할 수 있으며, 연천군의 다양한 참여업체의 체험과 숙박, 식음료를 할인 받아 이용할 수 있다. 5월 ‘구석기 축제’로 초대올해는 5월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는 ‘제32회 연천 구석기 축제’가 국내외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연천 구석기 축제는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생활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선사 체험 축제다. 이벤트가 열리는 연천 전곡리 유적은 유네스코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의 중심지로, 축제와 더불어 연천의 대표 관광지 임진강 주상절리, 재인폭포, 태풍전망대 등까지 한 눈에 즐길 수 있다.올해는 구석기 바비큐부터 독일, 일본, 네덜란드, 인도 등 전 세계의 구석기 시대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또 이른 더위를 날릴 구석기 스플래쉬 어드벤처(워터슬라이드 및 패들보트 풀장)와 구석기 의상을 대여해주는 ‘전곡리안 의상실’, 구석기 올림픽 ‘아슐림픽’ 등 즐길거리가 다양하다.5월 5일에는 야간공연으로 군민화합 특별공연과 함께 드론쇼 및 불꽃놀이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곡리안 컬러풀 나이트 DJ 공연, 전곡 나이트 시네마, 야간 바비큐비어 페스타, 구석기 밥상대전 등 저녁까지 스케줄이 알차다. 또한 전곡선사박물관에서는 구석기축제 기념 특별전 ‘아름답고 슬픈 멸종동물 이야기’도 열린다. 연천군 관계자는 “연천 구석기 축제는 단순한 문화행사가 아니라, 인류문화사의 한 획을 그은 연천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축제로, 2029년에는 연천세계구석기엑스포를 개최할 것”이라며 “이번 축제를 통해 구석기 세계관 속에 힐링하고, 연천의 자연과 문화를 함께 즐기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연천군은 올해 하나투어와 연천 관광기획전을 기획해, 축제기간 당일버스투어와 관광열차로 서울 접근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권지예 기자 kwonjiye@edaily.co.kr 2025.04.09 07:30
스포츠일반

허진석 한국체대 교수 게재...20세기 독일 체육학자가 바라본 손기정의 모습은

한국체대의 허진석 교수가 20세기 초 독일의 스포츠 학자 겸 행정가인 칼 딤(Carl Diem)이 기록한 한국의 모습을 논문을 통해 담았다.허진석 교수는 최근 한국체육사학회지(제29권 제3호)에 「Carl Diem의 동아시아여행기에 나타난 KOREA 인식과 그 영향에 대한 고찰」을 게재, 일제강점기 시절 딤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을 소개했다.딤은 독일 현대 스포츠의 발전에 다양한 방면에서 기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업적은 행정가, 교육인, 정책입안자 등 세 분야로 집약되다. 그의 모든 활동이 독일 현대 스포츠와 체육 교육, 나아가 유럽을 넘어 세계 스포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딤은 행정가로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사무총장을 맡았으며,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성화 봉송을 기획하고 실현한 인물이다. 1947~1962년 독일체육대학 총장으로 일했고, 정책가로서는 독일사회체육시스템을 상징하는 '황금계획' 입안자의 한 사람이다. 이러한 인물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경성을 방문해 국제경기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국내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딤은 1942년에 간행된 『올림픽의 불꽃』 제2권의 「동아시아 여행기」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해 언급했다. 여행기는 11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8번째 항목이 1929년 10월 15일부터 17일에 이르는 식민지 조선 체류 기록이다. 'Korea'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딤은 1929년 11월 10일 베를린 소재의 독일 유력지 『포시셰 차이퉁(Vossische Zeitung)』에 기고한 대회참가 보고서에서도 한반도 방문 경험을 언급한 바 있다. 딤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일본과 독일의 육상대항경기에 참가하는 독일선수단을 이끌고 식민지 조선의 경성을 방문했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경험을 신문 기고와 저서를 통해 남긴 바 있다.딤이 방문 당시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하여 신문 기고와 저서로 남겼다는 사실은 스포츠사의 영역을 넘어 시대적 고찰의 동기를 제공한다. 허진석 교수는 딤의 기록을 당대의 국내 신문 보도와 비교한 다음 그의 경험과 기록이 독일 스포츠 계에 남겼을 Korea에 대한 정보와 이미지를 유추한다.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당대 한국 체육계의 스타, 손기정에 대한 인식이다. 논문은 당대 독일과 서구사회가 손기정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지형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는지를 확인한다.딤의 기록을 살펴보기 전까지 한국 사회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에 대한 독일의 인식이 미지의 동양인, 또는 일본 선수 가운데 하나라는 평면적 인식에 머물렀을 것으로 여겨 왔다. 하지만 허진석 교수는 독일 사회에 일본이 식민 통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형에 대한 폭넓은 교양과 이해가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했다.1929년 일본과 조선, 만주를 방문했던 딤은 훗날 저서와 신문 기고에서 각종 수치와 관찰 결과를 들어가며 한반도 주민과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드러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와 같은 눈높이와 정치적 등고선에 자신을 위치시켰고, 조선과 조선인을 타자화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딤은 경성에서 열린 박람회를 일본 통치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행사로 받아들였다. 경성에서 경기에 참가한 일본의 운동선수들은 조선인들이 본받아야 할 존재들이라고 인식했다.딤의 이러한 인식은 그가 독일 체육계와 지식 사회에서 점유하는 위상에 비추어볼 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손기정이 올림픽에 참가한 1936년은 딤이 동아시아 여행을 다녀온 뒤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독일 사회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판도 아래에서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더욱 구체화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허 교수는 논문을 통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손기정의 노력과 별개로 독일 사회는 이미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을 거로 봤다. 논문은 당시 독일 언론의 보도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허 교수는 올림픽 경기 중계에서 손기정을 "Koreanische Student(한국의 학생)"라고 지칭한 것은 독일과 서구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동아시아와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할 뿐이고, 이는 새삼스러운 발견이나 진실의 고백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허 교수는 이 같은 결론이 손기정의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에 대한 의구심과는 무관하며, 그에 대한 연구가 답습해온 '망국의 설움' '일제에 대한 저항'의 틀에서 벗어나 손기정을 세계 스포츠와 올림픽 역사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재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환기한다고 지적했다.허 교수는 또한 1936년에 세계 최고의 마라톤 선수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이해의 영역은 슬픈 시상식과 일장기 삭제 사건에 머무르며 학술 연구도 '민족정신'과 '애국심'의 패러다임을 탈피하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차승윤 기자 2024.10.24 14:12
생활문화

[황교익의 Epi-Life] 늙은 농민의 나라

“예전에는 서울에서 농민 시위를 참 많이 했잖아요. 요즘은 잘 안 보이던데.”“우리 농민이 이제는 늙어서요, 서울에는 힘이 들어서 못 갑니다.”농촌 지역의 어느 행사장에서 농민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5년 전 즈음입니다. 그동안에 농민은 더 늙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3년 현재 농민 중 60세 이상이 70%에 육박합니다. 70세 이상이 36.7%, 60대가 30.6%입니다. ‘늙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농촌에는 이미 와 있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싫어하잖아요. 차 막힌다고….”농민이 늙어서 이제는 서울에 못 간다는 말보다 이 말에 저는 가슴이 더 아렸습니다. 농민의 사정에 공감하지 않는 서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는 뜻일 것입니다.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해로 가기 전에 충남 예산에서 농민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농민독본>이라는 책을 써서 이웃을 가르쳤습니다. <농민독본>의 ‘농민’ 편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과거 4000여 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느 때에 비록 하루라도 농업을 아니 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역사의 첫머리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혀 농민의 나라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제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태정태세문단세’의 왕조 역사였습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의 왕들이 무슨 일들을 했는지 외우는 것이 역사 공부의 9할이었습니다. 그들 왕이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배웠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역사관은 달랐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라고 농민에게 가르쳤습니다.산업화 이전 대한민국은 인구 분포상 농민의 나라인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 인구의 80%가 농민이었습니다. 1970년대까지 선거 유세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저는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산업화는 농민을 도시로 밀어내어 노동자로 만들었습니다. 산업화 초기에는 도시에서 돈벌이를 하는 노동자여도 자신이 농민의 자식이라는 인식은 하고 살았습니다. 어버이와 삼촌, 이모, 고모, 사촌 등등 피붙이가 농촌에 살았고, 명절에 고향 농촌을 찾아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제가 서울에서 처음 목격한 농민 상경 시위는 1988년 ‘고추 투쟁’이었습니다. 고추 가격이 폭락하자 농민들이 고추를 트럭에 싣고 와서 민정당사 앞에 내려놓고 시위를 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면서 우루과이 라운드 사태로 농민이 서울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서울 시민들도 농민 시위에 합세를 하거나 곁에서 응원을 하였습니다. 농민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때만 해도 대한민국은 농민이거나 농민의 자식으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2024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 중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4%입니다. 도시의 노동자는 이제 농민의 자식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식입니다. 노동자의 자식에게 농민의 사정은 먼먼 남의 일입니다. 농민이 서울에서 시위를 하면 농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생각보다 당장에 여러 불편만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다 눈치가 있습니다. 늙은 농민은 더 이상 서울에 올라오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윤봉길 의사가 농민운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농민을 잘살게 하려면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일제 착취를 종식시키는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일 수 있다고 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먹을거리 생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농민독본>에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우리나라가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늙은 농민의 나라에서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농민의 사정은 우리 먹을거리의 사정입니다. 노동자의 손자, 아니 증손자 현손자이어도 좋은 먹을거리를 확보하려면 농민의 사정을 살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늙은 농민은 쌀값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2024.10.10 07:00
생활문화

[황교익의 Epi-Life] 옹졸하게 김수영을 떠올렸습니다

지난달에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 출입기자단을 초청하여 만찬 행사를 가졌습니다. 만찬장에는 안동 한우고기, 완도 전복, 제주 오겹살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해진미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김치찌개와 달걀말이만 특별나게 언론에 부각되었습니다.윤 대통령이 제공한 레시피로 조리한 김치찌개이고, 윤 대통령이 직접 조리한 달걀말이여서 특별난 음식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만찬장에 대통령실 요리사가 조리한 김치찌개와 달걀말이가 놓였다면 안동 한우고기와 완도 전복, 제주 오겹살 등에 밀려서 언론에 단 한 줄도 나지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설렁탕은 조선시대 선농단에서 비롯한 음식이다. 임금님이 선농단에서 친경 행사를 할 때에 구경 나온 백성들을 위해 친경에 동원된 소를 잡아 국을 끓여 나눠 먹였는데, 선농단에서 먹은 탕이니 선농탕이라 하였다가 설렁탕으로 변하였다.” 온 국민이 아는 설렁탕 스토리입니다. 설렁탕 가게에는 반드시 이런 글이 붙어 있고 설렁탕을 다루는 방송과 기사 등에서 반복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허구입니다. 그것도 최근에 밝혀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밝혀진 허구입니다. 한국음식문화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이성우 교수는 한국식품문화사(1982년 간행)에서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두고 있습니다. “영조(1724~1776)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고어사전인 ‘몽어유해’에 의하면 몽고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고 있다. 맹물에 소를 넣고 끓인다면 곰탕이나 설렁탕의 무리이다. 따라서 곰탕은 '공탕'에서, 설렁탕은 ‘슈루’에서 온 말이라고 봤으면 한다. 오늘날의 곰탕과 설렁탕은 동류이종일 따름이다. 설렁탕을 선농단에 결부시키는 속설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후세의 어거지 설인 듯하다.” 한국음식문화사 전공학자가 설렁탕은 선농단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음에도 선농단 유래설은 지금도 강력하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설렁탕을 먹다가 제가 이성우 교수의 글을 들려주면 사람들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보입니다. ‘왕이 백성에게 베풀었던 국물’이라는 강력한 스토리를 전공학자의 연구로도 이겨내지를 못하는 것이지요.저는 이런 일에 포기를 모릅니다. 학자가 안 되면 시인이라도 불러와야 합니다. 설렁탕 뚝배기 위에 숟가락을 걸어놓고 휴대폰을 꺼내어 시를 읽어줍니다."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시인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의 일부입니다. 시를 읽고 나서 사람들에게 조근조근 말을 합니다. 이때에 흥분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진지해야 합니다. 음식 스토리도 역사관과 국가관, 그리고 시민의식과 공동체 정서까지 담아내어야 한다는 상식을 그 짧은 순간에 공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훌륭한 왕도 있기는 합니다. 세종대왕님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은 대체로 무능했습니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들 때에 이씨 왕가는 한반도의 땅과 백성을 일본 왕족에게 팔아먹었습니다. 그 대가로 이씨 왕가는 일본 왕족 대우를 받으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조선 왕가에 분노하지는 못할망정, 그들에게 은혜라도 입은 듯한 표정으로 이 설렁탕 국물을 들이키는 것은 민주공화국 국민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대통령실 출입기자단 여러분이 윤석열 대통령이 내어주는 김치찌개와 달걀말이를 참 맛나게 드시는 것을 보며 저는 옹졸하게도 김수영의 시를 떠올렸습니다. 2024.06.20 08:04
생활문화

[황교익의 Epi-Life] 노포에서 선불을 당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돈을 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돈부터 내고 음식을 먹는 식당도 있습니다. 손님이 음식을 가게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있게 해놓은 식당은 선불을 받습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가 대표적이지요. 선불을 받는 식당이 또 하나 있는데, 노포가 그럽니다. 국밥이나 국수를 파는 식당인데 선불을 받습니다. 노포에 자주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노포의 선불 관습을 잊어버립니다. 주문을 하고 나서 종업원이 “선불입니다” 하면 그때서야 “아, 선불이지” 하고 지갑을 찾습니다. 노포에서 단골인 척 종업원이 말하기 전에 지갑부터 꺼내는 일이, 저는 없습니다. 갈 때마다 저는 당황합니다.왜 노포는 손님에게 선불을 요구하는지 ‘진지하게’ 취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원래 거의 모든 식당이 선불이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돈 없다고 외상을 달거나 도망을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외상이 너무 많아서 문을 닫는 식당도 있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노포는 옛날에도 선불이었고 지금도 선불이니 달라진 것은 없고, 요즘의 식당들이 선불을 받지 않는 것이지요. 노포에서 선불을 당하고 나면, 마침 제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으면, 제 직업 의식이 발동을 하여 한국 외식업의 역사가 제 입에서 조근조근 자동으로 ‘방송’됩니다. 저의 말은 대체로 이렇게 시작됩니다.“윤봉길 의사가 쓴 ‘농민독본’ 알지요? 충남 예산에서 농민 야학을 할 때에 쓴 책이잖아요. 그 책의 농민 편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이다.’ 당시에 농민이 제일 많았으니까 그의 말이 맞지요. 그 농민들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정의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저는 일단 입을 닫고 상대방의 표정을 읽습니다. ‘노동자’라는 말에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는 빨갱이의 말이라고 배운 분들은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라는 문장에 기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표정이 안 좋다고 느껴지면 “이 집 음식은 말이지요” 하며 말을 돌려야 합니다. 제 말에 동의를 하는 표정이면 말을 이어갑니다. “산업사회 이전, 그러니까 한반도 사람들이 대부분 농민이었던 시대에는, 그러니까 윤봉길의 시대에는, 밥은 집에서 먹었습니다. 집 근처의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 밥때가 되면 온 식구가 모여 밥을 먹었습니다. 산업사회의 노동자가 되면 집에서 밥 먹는 일이 줄어듭니다. 노동자는 자본이 지정하는 장소로 이동하여 노동을 팔아야 하니까 외식을 하게 됩니다. 외식업의 발달은 노동자 계급의 확장과 함께 일어납니다.”여기까지 말하면 우리 앞에 놓은 음식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노포의 음식이 노동자의 음식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제가 외식이라고 했지만 사실을 매식이 적당한 말이지요. 외식은 음식을 먹는 장소에 의미를 둔 단어인데, 밥을 밖에서 먹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처지가 반영된 단어는 아닙니다. 노동자가 도시락을 싸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외식 중에 돈을 주고 사 먹는 음식은 매식이라고 해야 바릅니다.”매식이라는 말에 조금 전 종업원이 가져간 선불의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돈을 내고 밥을 먹으라.’ 야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노포의 선불 관습은 우리 선배 노동자의 삶이 고달팠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오히려 저는 고무되어서 이런 말로 마무리를 합니다.“이제는 선불 안 해도 되잖아요. 외상 달자는 사람도, 도망가는 사람도 없을 것인데 말이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선불 관습을 유지하는 것이 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선불을 당하면서 이런 말로 우리 스스로 위로할 수가 있잖아요. ‘예전에는 말야, 국밥 값 낼 돈도 없어서 먹고 튀는 사람들이 많았대요. 세상 참 좋아진 거지’ 하고요. 안 그래요?” 2024.06.13 07:00
세계

中 왕이 외교부장 "한반도 대립 도모하는 세력, 큰 대가 치를 것"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7일 오전 양회 기자회견을 갖고 한반도 문제 등 중국의 전반적인 대외 관계 및 국제 정세에 대해 답했다.​왕이 부장은 “한반도 문제의 근원은 평화 체제를 수립하지 못한 때문”이라며 “누구든 한반도 문제를 빌미로 냉전과 대립을 도모하고 시대를 거슬러 역행한다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근본적인 대책은 평화 협상을 재개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대만 문제와 관련해서 왕이 부장은 “국제 사회가 모두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 믿는다”라며 “시간문제일 뿐이다”고 밝혔다. 또 “하나의 중국 원칙을 더 적극적으로 견지할수록 대만 해협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만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며, 대만을 독립시키려는 자들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 밝혔다.​미·중 관계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왕이 부장은 “중국의 입장은 상호 존중, 평화공존, 협력 상생”이라며 “이는 미중 관계 반세기여 동안의 경험과 교훈이자 대국 간 교류 협력에 대한 파악으로 미중 양국이 공동으로 준수하고 노력해야 할 방향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전제는 상호 존중이다"라며 “미중 양국이 손잡고 함께 한다면 양국과 세계에 도움이 되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또 "일부 국가가 국제사무를 독점하고 실력으로 국가의 등급을 나눈다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밝히며 “각국은 유엔을 핵심으로 하는 국제 체제의 틀 안에서 행동하고 글로벌 거버넌스의 프로세스에서 협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중-러 관계와 관련 왕이 부장은 “중·러관계를 잘 수호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세계 발전 추세에 순응하는 필연적인 요구”라고 주장하며 "세계에서 패권은 더 이상 민심을 얻지 못하고, 냉전이 재현되어서도 안된다”라고 언급했다.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에 관해서는 “중국은 팔레스타인이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면서 “팔레스타인 국민이 겪는 역사적 불평등을 이어가서는 안 되며, 이를 오래도록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이·팔 충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중동 지역의 항구적 평화를 전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우크라이나 위기에 관해서는 “중국은 휴전과 평화 협상을 위해 다리를 놓을 것”이라면서 “어떤 충돌이든 그 종점을 테이블에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중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인공지능에 관해서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장벽을 설치한다면 새로운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며 “각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제 산업망과 공급망을 파괴하는 것”이라 밝히며 “기술 공유를 촉진하고 스마트 기술의 격차를 줄여 어느 나라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 밝혔다.일대일로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왕이 외교부장은 “지난 10여 년 동안 ‘일대일로’는 세계인 국제 협력 플랫폼이 되었다”면서 “중국은 각 측과 함께 실크로드 정신을 전승해 두 번째 황금기를 열어갈 것”이라 말했다. 또 인류 운명공동체 구축에 관해 언급하며 “세계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정확한 방향을 제시했으며, 인류의 운명은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결정하고 세계의 미래는 모두가 함께 창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자료제공: CMG 2024.03.08 09:44
연예일반

‘노량’·‘경성크리처’·‘일 테노레’, 한일 역사 직시하게 만드는 K콘텐츠의 힘 [줌인]

“일본 대중도 과거 반일로 여겼던 것을 이제는 콘텐츠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K콘텐츠가 반일과 극일을 넘어 한일 양국의 역사를 직시하는 새로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이른바 ‘국뽕’에 초점을 맞춘 서사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보다 깊이 있게 짚으면서 그 안에 보편적인 감성을 드러내는 서사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최근 극장가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노량: 죽음의 바다’, 일본에서도 화제가 된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 뮤지컬신에서 주목받고 있는 ‘일 테노레’는 모두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지난달 20일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는 임진왜란 시기인 1598년 12월 이순신이 왜군 함대에 맞서 싸운 노량해전을 배경으로 한다. 조선에서 퇴각하려는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전장에 나선 이순신의 최후를 그린다.‘경성크리처’와 ‘일 테노레’는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다. ‘경성크리처’는 베일에 싸인 병원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일본군의 생체 실험을, ‘일 테노레’는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를 꿈꾸는 윤이선과 공연을 함께 준비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 작품 모두 암울했던 시기를 날줄로, 그 안에서 벌어진 개인의 서사를 씨줄로 엮어 보편적인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일 테노레’ 제작사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는 “일제강점기라는 험난한 시대에 꿈을 가진 한 인물의 서사에 관심이 갔다. 오페라 테너로서의 꿈을 꾸는 인물의 이야기에 보편성과 예술성을 충분히 확보하면 세계 시장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다”며 “보편성과 예술성은 어떤 소재,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이를 이루는 것에 집중했다”고 말했다.이 같은 서사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조나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시대에 맞선, 시대를 헤쳐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국을 넘어 글로벌 공감대를 사고 있다. ‘경성크리처’ 시즌1은 공개 3일만에 국내 1위, 넷플릭스 글로벌 톱10(비영어) 부문 3위에 올랐으며 전 세계 69개국 톱10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등 뜨거운 반응을 불러 모았다. 일본에서도 관심이 높다. 공개 직후 일본 넷플릭스 7위를 기록한데 이어 이틀째에는 2위로 올라섰고 이후에도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노량: 죽음의 바다’도 아메리칸필름마켓에서 일본 배급사 트윈에 선판매돼 일본 개봉을 앞두고 있다.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옛날에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면 우울하고 비극적인 내용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 가운데서도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결이 다르게 변하고 있다”며 “이제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먹혀들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이 같은 콘텐츠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경성크리처’에서 윤채옥 역을 맡은 한소희는 자신의 SNS에 직접 찍은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인간을 수단화한 실험 속에 태어난 괴물과 맞서는 찬란하고도 어두웠던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글을 게재했는데, 이후 일부 일본 네티즌의 악플 세례를 받기도 했다.이에 대해 한소희는 “‘경성크리처’ 시즌1이 공개되고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다른 쪽으로 의견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윤채옥과 장태상(박서준)의 러브스토리에만 집중하지 말고 다른 삶을 가진 사람들에 집중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올린 것”이라고 밝혔다. 한소희의 뜻처럼 일본 네티즌 중에선 ‘경성크리처’를 통해 조선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731부대 등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됐다는 의견도 올라오고 있어 K콘텐츠를 통한 양국의 인식 개선도 이뤄지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옛날처럼 민족주의 정서에 기댄 게 아닌,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것이 배경적인 요소를 넘어 재미를 주기 때문에 꾸준히 나오는 것”이라며 “서사의 힘이 글로벌 감성을 만나 일본 대중도 과거 반일로 여겼던 것을 이제는 콘텐츠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고 짚었다.역사적 사실을 조명하는 것은 물론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 대중까지 이해시키고 한국과 일본 사이 가교 역할을 하며 민간 차원의 갈등 봉합에 기여하고 있는 K콘텐츠. 한국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 안의 사람들의 삶은 어땠는지를 전하는 문화 사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세빈 기자 sebi0525@edaily.co.kr 2024.01.18 05:50
프로축구

20년 희로애락 담았다…인천 창단 20주년 전시실, 팬들에게도 공개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난 20년간의 희로애락이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전시 공간에 모두 담겼다.인천 구단은 창단 2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24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하나원큐 K리그 1 2023 37라운드 홈경기에 경기장 내 구단 20주년 기념 전시실을 신설했다고 29일 밝혔다.인천 구단은 지난 울산전 홈경기 사전 행사로 구단의 20년 역사를 조명하는 전시 공간을 공개했다. 기존의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서측 오션라운지 공간을 창단 2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구단 역사 전시실로 새로 단장한 것이다.본 전시실은 2023년 4월부터 6월까지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된 기획특별전 <다시, 비상: 인천유나이티드 F.C. 2003-2023>의 연장선으로 시립박물관 측의 협조하에 해당 전시회를 참고하여 조성됐다.또한, 2005시즌 통합 준우승을 이끌었던 장외룡 감독을 비롯해 문학경기장 시절 팀을 이끌었던 주장 임중용 선수 및 골키퍼 김이섭 선수 등 구단 레전드들과 팬들의 소중한 기증품으로 꾸려졌다.전시실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1부는 한반도에 축구를 가장 먼저 전파했다고 알려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부터 2002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 대 포르투갈전 승리의 열기를 발판 삼아 시작된 인천 구단의 창단 과정 등 인천 축구 역사를 전시하였으며, 2부는 2004시즌부터 2022시즌까지 인천 구단의 주요 연혁, 유니폼 그리고 유물 전시 및 구단을 빛냈던 레전드들의 유물 전시 등으로 구성됐다. 마지막으로 3부는 ‘팬 존(Fan Zone)’으로 인천 구단 서포터즈 응원 물품 및 영상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서포터즈가 기부 방식으로 해당 공간을 손수 꾸며 의의를 더욱 빛냈다. 울산전 홈경기 전 열린 개관식에는 전달수 구단 대표이사, 손장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비롯해 기증자 등 인천 시민과 팬들도 함께하며 자리를 빛냈다. 개관식은 전달수 대표이사의 환영사로 막이 올랐다. 전달수 구단 대표이사는 “인천시립박물관 및 팬 여러분들의 소중한 도움으로 우리 구단 20주년 역사를 기념하는 전시 공간이 조성되었다. 앞으로 구단이 명문 구단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후 손장원 시립박물관장의 축사가 이어졌고 테이프 커팅식 이후에는 유물 기증자들을 위한 기증식이 진행됐다. 전시 공간 라운딩 및 인천시립박물관 도슨트의 일일 전시 해설을 끝으로 개관식이 마무리됐다.기념관은 2023시즌 종료 후 전시 콘텐츠를 보완하여 2024시즌 매 홈경기 시민과 팬들에게 본격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기념관 전시 시간은 매 홈경기 경기장 개방 시간부터 킥오프 전까지다.김희웅 기자 2023.11.30 00:43
생활문화

[황교익의 Epi-Life] 맛보지도 못한 새만금 밥맛 타령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 냄새를 맡았을 때 구수하고 달콤한 향이 나며, 입안에 넣었을 때는 밥알이 낱낱이 살아 있음이 느껴지고, 혀로 밥알을 감았을 때 침이 고이면서 단맛이 더해지며, 살짝 씹을 때는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이빨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켜야 한다.”졸저 ‘미각의 제국’(2010년, 따비)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맛있는 밥의 기준을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이었지요. 당시에 식당 밥이 맛이 없어서 혼자 궁시렁거리며 썼던 것입니다.요즘 식당 밥이 어떠냐 하면 “대체로 만족”입니다. 좋은 쌀로 그때그때 밥을 해서 내는 식당이 많이 생겼습니다. 공장에서 가공한 밥까지도 맛있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음식의 질은 저절로 올라갑니다. 2010년에 했던 밥투정이 어색해 보일 정도로 세상은 크게 바뀌었습니다.쌀이 우리 민족의 주식이라고는 하나 쌀밥을 넉넉하게 먹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이 땅의 민중은 잡곡과 초근목피로 버티었습니다. 극히 일부의 지배계급 빼고는 가을걷이 때에 잠시 쌀밥을 구경할 뿐이었습니다. 1973년 통일벼가 보급되었습니다. 인디카계의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어 밥의 찰기가 떨어지고 키가 작아 볏짚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등 여러 단점들이 있었으나 다수확이라는 단 하나의 장점에 비하면 그 단점들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76년 쌀 자급률 100%를 기록하였습니다. 한반도 사람들이 마음껏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1980년대에 들면서 한국 경제는 급성장을 하였습니다. 중산층이란 계급이 만들어졌습니다. 아파트에 살면서 자가용차를 몰고 다니는 핵가족이 등장하였지요. 그들은 햄버거, 피자, 프라이드 치킨 등 미국식 음식을 먹는 것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였습니다.한국 외식 음식들도 중산층의 수요에 맞추어 재편성되었습니다. 식탁에 불판을 올리고 소갈비와 등심, 삼겹살과 돼지갈비를 구웠습니다. 불판 위에 냄비를 올리고 끓이는 탕도 번창하였습니다. 생선회도 대중화되었고요. 그 모오든 상차림에서 밥은 후식으로 밀려났습니다. 고기 구워 먹고, 탕 끓여 먹고, 생선회 먹고 나서, 더 먹을 배가 남아 있으면 밥을, 그것도 국수나 냉면과 비교해가며,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인당 쌀 소비량은 급격하게 줄었습니다.한순간에 남아도는 쌀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1992년 통일벼가 퇴출되었습니다.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쌀의 자급을 이루게 해준 벼 품종이 기껏 20년 만에 사라진 것이지요. ‘쌀밥 더 먹기 운동’이 30년이 넘게 진행되었지만 성공적인 방법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큰 변수가 없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새만금은 원래 농지로 쓰기 위해 간척을 한 땅입니다. 새만금 계획 당시에는 도시화로 농지가 줄어들고 통일되면 북한 주민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쌀이 남아돌고 남북 관계도 안 좋으니 새만금을 농지로 쓰자는 말은 쑥 들어가고, 온갖 활용 방안이 제시되고 있습니다.새만금 간척지에서 잼버리를 한다고 세계 각국에서 온 4만여 명의 청소년들을 무더위와 벌레에 시달리게 하여 돌려보냈습니다. 새만금에 텐트를 쳤던 청소년들에게 그 땅은 원래 어떤 용도로 간척한 땅인지 설명이나 했는지 궁금합니다. ‘통일 이후의 식량 안보를 위한 농지’ 같은 말은 어렵더라도, 한반도에서 쌀밥은 유토피아를 상징했으며 새만금이 그 유토피아를 이루어줄 것이라고 한때 온 국민이 믿었다는 설명은 해주었어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새만금이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의 첫 자를 따와서 붙인 이름입니다. 새만금이 벼농사 짓기에 더없이 좋은 땅입니다. 간척지 쌀이 맛있는 것은 다들 아시지요. 새만금에서 거둔 쌀을 잼버리 야영장 청소년들에게 밥을 지어 먹어보라고 주었는지 어땠는지,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었겠지요. 인명 사고가 안 나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맙니다. 2023.08.17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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