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인터뷰] '운동선수' 아닌 '사람' 박승희, "나는 1절이 끝나고 2절로 이어지는 노래"
"저는 이제 1절이 끝나고 2절로 이어지는 노래죠."햇수로 꼬박 17년, 깨어있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함께였던 스케이트를 벗고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날의 박승희(26)는 한껏 행복해보였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이번 대회가 끝나면 은퇴하겠다"던 그는 자신의 말대로 지난 10일 은퇴를 선언했다. 스포츠토토 빙상단 동료들의 축하 속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박승희의 얼굴에서 은퇴에 대한 아쉬움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이날 가평 HS Ville 펜션에서 만난 박승희는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은퇴해서 정말 좋다"고 거듭 강조했다.내 인생의 1막 2014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전 종목 메달 획득, 여자 쇼트트랙 최초의 올라운드 스케이터, 한국 빙상 최초로 올림픽 두 종목(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한 선수…. '운동선수', '스케이터' 박승희를 설명할 때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피겨스케이팅 만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빙상장을 찾은 소녀는 17년 동안 스케이트를 신고 이토록 많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인생의 3분의 2 가까이 운동에 매진하면서 얻은 결실이다. 그러나 정작 스케이트를 벗는 날, 박승희는 "운동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선수로서는 이제 끝이지만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 서지 않을 뿐"이라고 말을 이은 박승희는 "다른 직업을 갖고 다른 도전을 해나갈 거라 큰 아쉬움이 없다. 운동하는 나를 좋아해주시고 많이 아쉬워해주신 분들도 계시지만, '사람' 박승희를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많다. 나는 이제 1절이 끝나고 2절로 이어지는 노래"라며 쾌활하게 웃었다.한없이 긍정적인 박승희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박승희는 "운동이 모든 것이라 생각하면 작은 일에도 여파가 크게 오더라. 그래서 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며 "그 덕분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긍정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이처럼 언제나 '긍정 마인드'였다. 2014 소치 겨울올림픽이 끝난 뒤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보지 않겠냐, 전지훈련에 함께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고 큰 고민 없이 물흐르듯 스피드스케이팅을 시작했다. 스피드스케이팅으로 평창 겨울올림픽에 출전할 거란 욕심도 없었다. '동생들과 함께 도전해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선발전 통과, 그리고 올림픽 출전으로 이어졌다. 박승희는 "운도 따라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베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며 미소를 보였다. 마지막 올림픽으로 생각하고 나선 평창이지만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팀 추월 '왕따 주행' 논란이 불거지면서 선수단 안팎이 시끄러웠다. 조심스럽게 그 때 일에 대해 묻자 박승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말문을 연 박승희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또 빙상이나 체육계를 떠나 어디서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에둘러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박승희가 평창에서 남겨두고 온 아쉬움은 또 있다. 쇼트트랙에 대한 미련이다. 박승희는 "쇼트트랙으로 평창 겨울올림픽에 나섰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좋지 않았을까 싶다"며 "한국 사람들로 가득찬 경기장에서 올림픽을 치를 일은 다시는 없겠지 싶었고, 그런 점 때문에 부모님도 내색은 안하셨지만 많이 아쉬워하셨다"고 얘기했다.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뒤 그가 늘 해왔던 고민이다. 그래서 여력이 되면 계주만이라도 나가보려는 생각도 했다. 박승희는 "선발전을 병행해서 만약 통과하게 되면 계주에 나가고 싶었다. 스피드스케이팅에 집중하느라 포기하긴 했지만 그 때의 난 진지했다"고 돌이켰다. "후배들에게도 우스갯소리처럼 '계주는 타고 싶다' 그런 소릴 했다. 아마 그 때 내가 하는 소릴 들은 후배들은 그게 진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웃은 박승희의 눈가엔 씻지 못한 미련이 담뿍 남아있었다. 2막 도전, 1·2·3등 없는 곳, 그래서 새로운 곳선수 생활을 마무리짓고 인생 2막, 노래 2절을 시작하는 박승희의 새 도전은 잘 알려진 대로 운동과 전혀 다른 계열인 '패션'이다. 박승희는 "내가 운동을 그만두면 다른 쪽으로 갈 거란 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도 잘 알고 계셨다. 어릴 적부터 꿈이었는데 엄마가 취미로 시킨 운동으로 빠졌던 것"이라며 "워낙 옷을 좋아해서 스스로 만들어서 입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색감에 대해서도 민감하다보니 그래픽 디자인 쪽으로도 관심이 생겼다. 미술, 패션 등 종합해서 1~2년 정도 배워보고 직업에 대해 고민할 생각"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귀띔했다. 한 때는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생각했지만 지난 4년간 스피드스케이팅을 하면서 홀로 외롭게 빙판을 지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발목을 잡았다. "혼자 지내진 못할 것 같다. 스피드스케이팅할 때 혼자 타는 게 너무 외로웠다"고 얘기한 박승희는 "그래서 매스스타트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웃었다. 박승희와 어머님 이옥경 여사혹시나 싶어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은 '0%'인지 물었다. "베이징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은 박승희는 깔깔 웃었다. "선수로서는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고 단언한 그는 "해설위원 얘기는 많이 들었다. 만약 해설위원으로 가게 된다면 스피드스케이팅 말고 쇼트트랙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고 대답했다. 겨우 4년 한 걸로는 스피드스케이팅 해설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승희는 "쇼트트랙은 해온 시간도 있고 경기를 보면 여러 가지가 보이는데 스피드스케이팅은 그렇지 않더라"며 "만약 불러주신다면 쇼트트랙"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해설위원이 아니라도 베이징에서 박승희의 모습을 볼 가능성은 하나 더 남아있다. 코치다. 박승희는 "예전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후배들 얘기 들어주고, 또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두 종목을 모두 하다보니까 생각이 좀 바뀌었다"고 얘기를 꺼냈다. "지도자들이 조금만 돌려 말하면 선수들도 잘할 수 있을텐데 싶은 부분이 있고, 선수들 힘든 부분도 잘 알다보니 특히 여자 선수들에게 도움되는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아직은 생각만 하고 있는 단계다. 일단 박승희는 자신의 인생 2막을 충실하게 준비할 예정이다. 오는 6월부터 원래 배우던 미술과 패턴 공부를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는 박승희는 "화방을 다니면서 유화 공부도 하고 싶고, 복싱으로 다이어트도 하고 싶다. 이제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인으로 살아야 하니까"라며 생글생글 웃었다. "좋아하는 걸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들었다. 결과가 스포츠처럼 곧바로 1, 2, 3등으로 나오는 게 아니니까"라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을 전한 박승희는 "생각해보면 스포츠는 정말 잔인하다"고 뼈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17년간 몸담았던 잔인한 승부의 세계에서 벗어난 뒤에야 할 수 있었던 고백이었다. 김희선 기자 kim.heeseon@jtbc.co.kr
2018.05.16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