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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 파이트클럽] 한 식구가 된 UFC와 WWE,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코너 맥그리거와 존 시나가 옥타곤이나 사각의 링에서 대결하는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최근 세계 스포츠 산업을 뒤흔들만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종합격투기와 프로레슬링의 세계 최대 단체인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와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가 한 식구가 된 것. UFC의 모기업인 엔데버(Endeavour) 그룹은 지난 2일(현지시간) WWE의 지분 51%를 인수한다고 공식발표했다.엔데버 그룹의 인수 작업은 올해 말에 마무리 될 전망이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공식적으로 WWE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향후 UFC와 WWE를 통합한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주식시장에 상장한다는 계획이다. WWE의 CEO였던 빈스 맥마흔이 새롭게 만들어질 회사의 회장을 맡게 된다. 기존에 UFC를 책임졌던 데이나 화이트 회장과 WWE의 공식적인 대표인 닉 칸 회장은 그대로 양 단체를 이끌게 된다. 엔데버 그룹의 CEO인 아리 엠마누엘이 두 단체의 운영을 총괄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엔데버그룹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비버리힐즈에 위치한 초대형 스포츠&엔터테인먼트 그룹이다. 2009년 거대 연예 기획사였던 엔데버(Endeavor)와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William Morris Agency)가 합병하면서 지금의 엔데버 그룹으로 발돋움했다.영화, TV, 음악, 디지털 미디어, 출판, 공연 등에서 큰 성공을 거둔 엔데버 그룹은 최근 들어 스포츠 산업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2013년 스포츠 매니지먼트 그룹인 IMG를 22억 달러에 인수 합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2016년에는 '카지노 업계 큰 손'인 퍼티타 형제(프랭크 퍼티타-로렌조 퍼티타)가 소유했던 UFC를 40억 달러(약 5조3000억원)에 인수해 업계를 발칵 뒤집었다.엔데버 그룹이 인수한 뒤 UFC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코너 맥그리거, 존 존스, 론다 로우지 같은 슈퍼스타들을 앞세워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격투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론다 로우지는 현재 WWE에서 활동 중이다). 7년 전 엔데버 그룹이 40억 달러에 인수했던 UFC의 기업 가치는 현재 121억 달러(약 16조원)로 3배 이상 늘어났다.UFC를 통해 큰 재미를 본 엔데버 그룹이 다시 눈을 돌린 것이 바로 WWE였다. 프로레슬링은 오늘날 가장 무섭게 성장하는 스포츠 분야다. 과거에는 실전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프로레슬링은 WWE를 통해 전세계가 열광하는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 및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 WWE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시간으로 지난 2일과 3윌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의 소파이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레슬매니아 39'는 역대 최대 규모인 2160만달러(약 285억원)를 벌어들였다. 글로벌 시청률과 스폰서십 판매, SNS 콘텐츠 소비량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대회 관련 동영상은 주말 동안 온라인 상에서 1100만 시간의 시청시간과 5억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는 세계 최대 단일 스포츠이벤트로 인정받는 북미미식축구(NFL) 결승전 '슈퍼보울'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이번 엔데버의 인수 계약으로 2021년 40억 달러 수준이었던 WWE의 기업 가치는 대략 93억 달러(약 12조원)으로 치솟았다. 기존 121억 달러(약 16조원)인 UFC와 합병하게 되면 214억 달러(약 28조원) 규모의 초대형 스포츠 기업이 탄생하게 된다.그렇다면 UFC와 WWE가 한 식구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두 단체의 합병 이후 벌어질 사건들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코너 맥그리거 같은 UFC 파이터들이 프로레슬링에 등장하고 존 시나나 더 락 같은 프로레슬러들이 실제로 싸울지 모른다는 생각이다.실제로 UFC와 WWE는 오랜 시간 경쟁을 해온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어왔다. UFC는 WWE의 극적인 요소를 상당부분 차용했다. 인터뷰나 SNS를 활용해 선수들끼리 독설을 주고받으며 대립 및 갈등관계를 고조시켰다. 이는 팬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WWE에서 오랫동안 해왔던 것들이다. WWE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무대효과 등도 UFC가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WWE는 팬들의 몰입감을 높이고자 UFC의 실전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UFC에서 챔피언까지 지냈던 브록 레스너나 론다 로우지는 현재 WWE에서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프로레슬링과 종합격투기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시도하기도 한다.다만 WWE와 UFC가 당장 한 식구가 됐다고 해서 당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전망이다. 종합격투기와 프로레슬링은 닮은 듯 하면서도 전혀 다른 형태 산업이기 때문이다. 종합격투기는 실전을 바탕으로 한 진지함이 매력이다. 스포츠의 순수한 재미를 줘야 한다. 반면 프로레슬링은 많은 볼거리를 선물하고 극적인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자칫 어설픈 결합이 UFC의 실전성, WWE의 오락성을 해칠 수도 있다. 오히려 WWE 팬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WWE와 거리를 두는 듯 보였던 빈스 맥마흔의 영향력이 이번 합병을 통해 더 커졌다는 점이다. 빈스 맥마흔은 지난해 회사 내에서 불륜관계였던 전 여직원에게 비밀 유지 조건으로 수십억대 합의금을 지불한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 이로 인해 WWE 관련 모든 직무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WWE 팬들은 빈스 맥마흔의 그런 퇴장을 반가워했다. 그의 독선적인 경영 방식과 시대에 구태 의연한 사고 방식이 WWE의 재미와 발전을 막는다고 생각해서다. 빈스 맥마흔이 물러나면서 WWE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빈스 맥마흔이 일선에서 손을 떼면서 WWE는 시청률 등 각종 지표에서 다시 인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인수를 통해 새로운 합병 회사 회장을 맡게 되면서 빈스 맥마흔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졌다. WWE가 새 주인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팬들은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갈까봐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이석무 이데일리 기자 2023.04.0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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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의 파이트 클럽] 전설이 된 이노키, 격투스포츠의 혁명가

필자가 안토니오 이노키를 직접 본 것은 네 차례 정도 되는 것 같다. 두 번은 이노키가 방한했을 때고 두 번은 일본 격투기 대회 출장에서였다. 2006년 한국에서 이노키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몰랐다. 왕년의 유명했던 프로레슬링 선수로만 알았다. 다만 그와 악수를 나눴을때 엄청나게 큰 손과 떡 벌어진 어깨에 놀란 기억이 있다. 유독 발달한 그의 턱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왜 무하마드 알리가 이노키를 '펠리컨'이라 불렀고, 이노키가 "내 턱으로 네 주먹을 부숴버리겠다"고 큰소리쳤는지 이해가 됐다. 이노키는 격투스포츠 역사를 바꾼 혁명가였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의 도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격투스포츠는 아예 태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재일동포였던 그의 스승 역도산(일본명 리키도잔)은 프로레슬링을 철저히 ‘국뽕’으로 이용했다. 일본 전통 스포츠인 스모 선수 출신이었던 역도산은 일본식 당수 기술인 ‘가라데 촙’으로 반칙을 일삼는 미국 거인들을 쓰러뜨렸다. ‘천황 다음 역도산’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노키는 달랐다. 김일, 바바 쇼헤이(선수명 자이언트 바바)와 더불어 역도산의 3대 제자였던 이노키는 그 이상을 바라봤다. 그는 일본 프로레슬링을 대표하는 간판스타였지만,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1976년 6월 26일 빌본 도쿄의 부도칸(무도관)에서 열린 당시 복싱 헤비급 세계챔피언 알리(당시 34세)와 대결은 이노키가 어떤 마인드를 가진 사나이였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이야 종합격투기가 전 세계적인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지만, 그때는 서로 다른 투기 종목 선수가 ‘이종(異種) 대결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특히 알리라는 최고의 복서이자 셀럽이 그런 경기에 나선다는 건 더욱 그랬다. 이노키는 자신이 가진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알리를 격투기 링으로 끌어들였다. 알리에게 대전료 600만 달러를 약속했다. 2년 전 아프리카 자이레의 킨샤사에서 열린 조지 포먼과 헤비급 타이틀매치에서 알리가 받은 대전료는 500만 달러. 그 금액은 당시 프로복싱 역사상 최고 대전료였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 무승부였다. 이노키는 알리의 강펀치를 피하기 위해 매트에 드러누워서 킥을 날렸다. 알리는 그런 이노키를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세기의 대결’로 전 세계의 큰 관심을 모았던 경기는 ‘세기의 졸전’으로 전락했다. 경기가 끝난 뒤 알리는 이노키를 향해 “누워서 돈을 버는 것은 매춘부나 하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이노키는 알리에게 “매춘부가 누워있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라고 받아쳤다. 세월이 흘러 이 경기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복서인 알리는 알리대로, 레슬러인 이노키는이노키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싸웠다. 이 경기는 종합격투기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이 경기 아이디어를 발판삼아 일본에선 프라이드FC, 미국에선 UFC가 탄생했다. 심지어 알리는 서있고, 이노키는 드러누운 그 우스꽝스러웠던 자세는 ‘알리-이노키 포지션’이라는 이름으로 종합격투기에서 지금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알리와 대결을 통해 이노키는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거뒀다. 하지만 그에게 이 경기는 동시에 큰 시련이 됐다. 알리와 경기에 실망한 일본 프로레슬링 팬들은 이노키에게 등을 돌렸다. 티켓이 안팔려 예정된 대회가 줄줄이 취소되기까지 했다. 이노키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실전성을 강화한 프로레슬링’을 선언했다. 이른바 ‘스트롱 스타일’이었다. 그는 타 종목 선수와 여러차례 이종격투기 대결을 펼치면서 격투스포츠 대중화에 뛰어들었다. 1987년에는 간류섬이라는 무인도에서 마사 사이토라는 선수와 심판도, 관객도, 제한시간도 없는 격투기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저녁에 시작해 밤늦게 끝난 무인도 격투에서 이노키는 2시간 5분 14초 만에 슬리퍼 홀드로 TKO승을 거뒀다. 일본 팬들은 파격적인 경기에 다시 관심을 나타냈다. 그렇게 이노키는 재기에 성공했다. 이노키의 선수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극적이었고, 반전의 연속이었다. 이노키의 파격은 멈출 줄 몰랐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 북한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이벤트 쇼‘인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린 건 이노키가 아니면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이노키는 1995년 4월 28~29일 능라도 경기장에서 ‘콜리전 인 코리아’라는 프로레슬링 대회를 개최했고, 직접 출전도 했다. 이노키를 비롯해 릭 플레어 등 세계적인 레슬러들이 북한에서 경기를 치렀다. 심지어 파킨슨병 투병 중이었던 알리도 북한에 동행했다. 이노키는 스승이었던 역도산의 고향을 방문한다는 의미와 스포츠가 세상을 평화롭게 바꿀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대회를 첫째 날 16만 명, 둘째 날 19만 명 등 이틀에 걸쳐 35만 명이 관람했다. 현재까지도 이는 역사상 최대의 레슬링 이벤트로 남아있다. 당시 북한에서 이노키와 경기를 치렀던 플레어는 “북한에서 이노키와 대결한 것은 매우 겁나는 경험이었다. 북한 당국이 미국 선수단을 사흘이나 더 붙잡아 두고 공개적으로 성명 발표를 요구해 매우 심란했다”고 회고했다. 물론 이노키의 인생이 늘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줄곧 야쿠자와 결탁설이 끊이지 않았다. 독단적인 기질 탓에 그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이노키가 생전에 남겼던 엄청난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노키는 한국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 국민에게 이노키는 김일의 영원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김일과 이노키는 역도산 문하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동료였다. 17세 이노키의 프로레슬링 공식 데뷔전(1960년) 상대도 김일이었다. 일본에선 김일이 악역, 한국에선 이노키가 악역을 맡으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그 라이벌전에 열광했다. 둘의 우정은 노년까지 이어졌다. 노환과 빈곤으로 고생하던 김일을 위해 이노키는 매년 한국을 찾았고, 치료비를 지원했다. 1995년에는 일본에서 김일의 은퇴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2000년 12월에는 성남 나눔의 집을 찾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등 ‘스승과 친구의 나라’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항상 강하고 자신감 넘쳤던 이노키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그는 2020년 7월 난치병인 ‘심장 아밀로이드증’ 투병 사실을 알렸다. TV와 유튜브 등을 농해 투병과정을 공개하면서 재활 의지를 밝혔다. 건장한 몸은 크게 야위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얼굴의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빨간색 목도리도 여전했다. 2022년 10월 1일 이노키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을 더는 들을 수 없지만, 그의 유산은 영원한 전설로 남을 것이다. 2022.10.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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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의 파이트 클럽] 종합격투기는 왜 링 대신 철창에서 싸울까

종합격투기 UFC가 1993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첫 대회를 열었을 때 경기장을 찾은 7800명여 관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경기가 열리는 무대가 기존에 익숙했던 링이 아니라 철제 구조물로 된 철창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 검투사나 지하세계 격투기에서 죽음의 싸움을 벌이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동물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저런 데서 싸울 수 있느냐는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UFC 이전 격투기는 복싱 경기에서 사용되는 사각의 링에서 주로 열렸다. 대표적인 대회가 일본 종합격투기인 K-1과 프라이드FC였다. 링은 수백 년 동안 격투 스포츠에서 사용된 전통적인 경기 장소였다. ‘링’(ring)은 원형을 뜻한다. 오늘날 링은 사각 형태지만 계속 그 이름으로 불린다. 링이라는 이름은 판크라치온이라 불렀던 고대 그리스 레슬링에서 유래됐다. 고대 레슬링은 특별한 경기장이 없었다. 그냥 맨땅에서 알몸으로 부딪혔다.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막 싸운 건 아니다. 심판은 막대기로 땅에 대충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선수들은 그 안에서 대결했다. 이후 격투스포츠가 열리는 경기장은 형태와 상관없이 ‘링’이라는 용어가 붙게 됐다. 오늘날 사용되는 정사각형의 링은 1838년 영국을 기반으로 한 복싱 단체에서 처음 만들었다. 당시 이 단체는 정사각형 네 군데 꼭짓점에 기둥을 세우고 줄 2개를 연결해 최초의 링을 만들었다. 당시 좌우 폭은 7.3m였다. 링은 이후 복싱은 물론 종합격투기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프라이드FC를 통해 ‘종합격투기=링’ 이미지가 굳어졌다. 하지만 UFC는 다른 것을 원했다. 그들은 ‘무규칙 싸움’을 표방했다. 더 자극적이고 거친 분위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철창’이었다. 초창기에는 철창의 크기나 높이가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표준 규격이 정해졌다. 현재 UFC에서 사용되는 철창 높이는 1.8m, 경기장 지름은 9.1m다. 사실 철창은 링에 비해여러가지로 불리한 점이 있다. 일단 관중들이 보기에 불편하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철망에 가려 잘 안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에 비해 사방이 확 트여있는 링은 관중들이 보기에 훨씬 편안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UFC는 철창을 고수했다. 철창은 종합격투기 경기장의 표준이 됐다. UFC가 철창을 경기장으로 선택한 것은 단순히 자극적인 볼거리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위험해 보이지만, 오히려 선수들이 안전하기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이 개방된 링은 복싱이나 무에타이 등 입식타격기 경기를 치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누워서 싸우는 경우가 많은 종합격투기는 달랐다. 선수가 링 밖으로 떨어져 다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공정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공격당하는 선수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링 밖으로 몸을 내밀기도 했다. 공격하는 선수 입장에선 손해가 컸다. 게다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경기 흐름도 계속 끊겼다. 대회사 입장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물론 철창의 차갑고 거친 이미지는 긴장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필자가 직접 관전했던 미국 UFC 대회 당시 주최 측은 철창 가까이 마이크를 설치한다. 철창에서 나오는 소리를 그대로 관중들에게 전달한다. 관중들은 철창문이 철커덩하고 닫히는 소리, 찰칵하면서 문고리를 잠그는 소리, 선수들이 철창에 부딪히는 우당탕 소리까지 생생히 들을 수 있다. 철창에서 싸우는 격투기는 UFC가 최초는 아니다. 그 아이디어는 프로레슬링에서 오래전에 시작됐다. 1936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치킨 와이어 펜스 매치’라는 프로레슬링 경기가 처음 열렸다. ‘닭장’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철창은 작고 엉성했다. 이후 프로레슬링에서 종종 ‘스틸 케이지 매치’라는 이름으로 경기가 열렸고, 그 아이디어가 종합격투기까지 넘어왔다. UFC에서 활용되는 철창은 8각형이다. 그래서 ‘옥타곤’이라고 부른다. UFC가 왜 철창을 8각형으로 디자인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철창을 직접 설치하고 대회를 운영하는 국내 격투기 MAX FC 이용복 대표는 “8각형 형태가 철창을 운반하고 분해·조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수월하기는 하다”고 말했다. 참고로 UFC의 라이벌 단체인 벨라토르는 UFC를 의식해서인지 8각형이 아닌 6각형 철창인 ‘헥사곤’을 사용한다. 국내에서 열리는 브레이브CF 대회는 마치 새장 같은 원형 철창에서 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2022.09.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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