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일간스포츠 창간 특집-손연재①] “놀이공원 데이트, 내겐 꿈같은 일이죠”
“보면서 울었어요. 그 로봇이 저 같기도 해서….” 아직 눈물이 많을 10대 소녀. 그래도 홀로 러시아에서 2년을 버텨온 만큼 누구보다 강단이 있다. 웬만한 일엔 잘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런 그를 한 번에 무너뜨린 영화가 있다. ‘리얼 스틸’. 인간을 대신해 로봇들이 권투를 하는 미래, 전직 권투선수인 한 남자가 아들과 함께 버려진 로봇을 훈련시켜 영웅으로 만드는 스토리다.‘리듬체조 요정’ 손연재(18·세종고)는 세계선수권대회를 끝낸 지난해 겨울, ‘리얼스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무척 슬펐어요. 제가 운동을 해서 그런지…. 저도 그 로봇처럼 힘들게 올라왔잖아요. 큰 로봇들은 러시아 선수들에 비유가 되기도 했고.” 버려졌던 왜소한 로봇이 힘겹게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며 절로 감정이 이입됐다. 런던올림픽 이후 손연재는 어떤 메달리스트보다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불모지 한국에서, 동양인이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여겼던 리듬체조에서 세계 5위에 오른 근성이 높이 평가받았다. 한 취업사이트에선 '런던 올림픽 선수들 중 기업 채용 담당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입사원은 손연재’라는 설문 조사 결과를 내놨다. 깜찍한 외모의 그는 스포츠 ‘영웅’보다 스포츠 ‘요정’이 각광받는 시대에 꼭 맞는 스타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타 손연재의 일상은 생각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등 소소한 바람을 말하자 훈련밖에 모르고 살아 온 18세 소녀의 애환이 묻어났다. 20일 오후 태릉선수촌 근처 카페에서 훈련을 마치고 온 손연재를 만났다. 고된 훈련에 목이 탄 듯 그는 시원한 레몬에이드 한잔을 금세 다 마셨다. 질문지를 주고 답변을 써달라고 하자 시험을 치듯 진지하게 써내려갔다. 옆에 있던 어머니 윤현숙 씨는 “초등학교 숙제할 때 이후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며 신기해 했다.손연재의 첫째 소원은 ‘놀이공원’에 가는 것이었다. 꿈꿔본 일탈, 그리고 가고 싶은 데이트 장소도 모두 놀이공원을 꼽았다. 놀이공원 가는 걸 일탈로 꼽다니, 그가 얼마나 올림픽에만 일로매진했는지 엿볼 수 있어 안쓰러웠다. 1년 전 기자와 만났을 때도 놀이공원 얘기를 꺼냈던 그는 “2014년 말이 돼야 갈 수 있을 것”같다며 한 숨 지었다. 2014년엔 인천아시안게임이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갔던 대회 장소를 다시 한 번 여행해 보고 싶다는 소원도 드러냈다. “프랑스 파리도 여러 번 갔지만 제대로 본 적이 없고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갔던 나라들을 다시 찾아서 마음 편히 즐기고, 제대로 보고 싶어요.” 세계 각지를 다니지만 공항과 경기장 외엔 거의 가 본 곳이 없어다.손연재가 고치고 싶은 것은 의외로 ‘소심병’이었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강심장’ 손연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평소엔 괜찮은데 뭐 하나가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장난이 아니에요. 며칠 전엔 좀 덥게 입고 나갔어요. 엄마는 괜찮다고 하셨는데, 나가고 보니 약간 더워보이는 거예요. 그거 하나 때문에 하루 종일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웃음).” 그는 자신의 손을 보고도 속상해 했다. “훈련 한참 할 땐 손톱이 다 부러진다”며 손이 예쁜 친구들이 부럽다고 했다.‘리얼스틸’외에 좋아하는 영화는 얼마전 본 ‘광해’. 손연재는 조선시대 광해군의 얘기를 그린 영화 ‘광해’에 푹 빠졌다. “눈물이 날 것 같으면 금새 또 웃게 만들고. 2시간 동안 하나도 지루한 지 몰랐어요. 극장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박수치고 웃는 건 처음 봤어요.” 많은 사람들이 몰린 곳에 가기 힘든 손연재는 친구들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요즘 유일한 취미생활이다. 모자를 눌러쓰면 사람들이 잘 못 알아 본다. ‘오만과 편견’, 또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얘기를 그린 ‘비커밍 제인’ 등도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음악은 잔잔한 발라드 류를 좋아했다. 최근 친구로부터 소개 받은 B1A4의 '짝사랑', 러시아에서 한참 힘들게 훈련할 때 들었던 M.Y.M.P의 ‘Say you love me' 등을 베스트로 꼽았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러시아에선 음악으로 고달픈 일상을 달랬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지만, 손연재도 대학 입학을 앞둔 똑같은 10대다. 캠퍼스 생활에 대한 푸른 꿈에 부풀어 있다. 그는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려 보고 싶다. 선수가 아니었다면 미팅도 해볼 텐데, 그건 안 될 것 같다"며 아쉬워 했다. 손애성 기자 iveria@joongang.co.kr
2012.09.25 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