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번의 월드컵 대회에서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이끈 비율은 26.9%다. 즉 평균적으로 역대 월드컵에 참여한 국가의 네 나라 중 하나는 외국인 감독이 맡았다는 얘기다. 특히 2006 독일 월드컵은 외국인 감독의 전성시대였다. 참가국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5개국 대표팀을 외국인이 이끌었다.
제22회 월드컵인 2022 카타르 대회 참가국 중 대표팀 감독으로 외국인을 선임한 팀은 9개 나라다. 에콰도르, 카타르, 이란, 멕시코, 사우디 아라비아, 코스타리카, 벨기에, 캐나다와 대한민국이 외국인 감독을 가진 나라다. 에콰도르와 멕시코는 아르헨티나 감독을 택했고 카타르와 벨기에는 스페인 출신 감독이 맡는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캐나다의 감독은 각각 프랑스와 잉글랜드 출신이다. 근래에 들어 명감독을 많이 배출한 포르투갈은 한국과 이란을 지휘한다. 코스타리카의 감독은 콜롬비아 출신이다.
외국인 감독이 맡은 9개국 중 4개가 아시아 국가다. 일본과 호주는 2022 월드컵에 자국 출신 감독으로 나서지만, 이들도 외국인 감독을 즐겨 쓴다. 아시아 국가가 외국인 감독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국 감독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진 축구 기술을 가진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지휘해 자국 축구의 수준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기대한다. 현재 2022 월드컵에서 개최국 카타르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이 선전하고 있다. 분명 외국인 감독이 이들의 선전에 한몫했다고 본다.
벤투 감독의 한국은 2022 월드컵 우루과이전에서 대등한 경기 끝에 아쉽게 비겼다. [연합뉴스]
하지만 외국인 감독이 월드컵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들이 거둔 가장 좋은 성적은 준우승이었다. 잉글랜드의 조지 레이노는 스웨덴 감독으로 1958 스웨덴 월드컵 결승에 올랐으나, 펠레의 브라질에 패해 준우승에 머문다.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하펠은 네덜란드를 이끌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결승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우승은 개최국 아르헨티나가 차지했다.
축구 강국은 전통적으로 외국인 감독 선임에 인색했다. 독일과 브라질은 한 번도 외국인에게 월드컵 대회를 맡긴 적이 없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프랑스는 각각 1번 외국인 감독과 함께 월드컵에 나왔을 뿐이다.
좋지 않은 성적에도 극도로 외국인 감독을 거부하는 나라도 있다. 스코틀랜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8번 월드컵에 출전해 매번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한 번도 외국인 감독과 월드컵에 나온 적이 없다. 그에 반해 2022 대회에도 참가 중인 에콰도르는 월드컵 4번 출전을 모두 외국인 감독과 함께했다.
축구 종가인 잉글랜드도 외국인 감독 선임에 거부감을 가진 나라였다. 잉글랜드는 1990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지만 1994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 자국에서 개최한 유로 96에서 4강에 올라 부활하는 듯이 보였던 잉글랜드는 1998 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다. 유로 2000에서는 조별 라운드 통과에 실패했다.
이렇게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던 잉글랜드가 2002 월드컵 유럽 예선 첫 경기에서 독일에 패하자,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외국인 감독을 임명하는 초강수를 뒀다. 스웨덴 출신의 스벤 에릭손이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으로 선임됐다.
에릭손은 팀을 빠르게 재정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승승장구하던 잉글랜드는 뮌헨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에서 독일을 5-1로 대파한다. 에릭손은 잉글랜드의 영웅이 되었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2001년 11월 잉글랜드가 스웨덴과 친선 경기를 갖게 되자, 영국 언론의 관심은 에릭손에게 쏠린다. 비록 친선 경기였지만 에릭손 감독이 그의 조국 스웨덴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베팅업체 윌리엄 힐은 에릭손이 경기 전 어느 나라 국가를 부를지 내기까지 걸었다.
에릭손은 경기를 하루 앞두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웨덴의 모든 경기를 응원하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다. 잉글랜드는 지난 33년 동안 스웨덴을 이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잉글랜드가 이길 차례다.”
에릭손의 잉글랜드는 2002 월드컵과 2006 월드컵에서 연달아 스웨덴과 한 조에 속했다. 두 나라가 한조에 속할 때마다 그가 보여준 난처한 웃음이 필자는 지금도 기억난다. 잉글랜드 감독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에릭손. 하지만 조국을 상대로 이겨야 하는 그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대표팀 감독 파울루 벤투는 선수로 나선 2002 월드컵에서 한국에 0-1로 지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바로 그 경기가 벤투의 대표팀 은퇴 경기였다. 지도자로 변신한 벤투는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고 2014 월드컵에서 승점 4를 기록했으나, 골 득실에 밀려 16강 진출에 다시 한번 실패한다.
벤투는 20년전 자신을 은퇴시킨 한국을 이끌고 2022 월드컵에 나왔다. 벤투가 세 번째 도전하는 16강 길목에 그의 조국 포르투갈이 버티고 있다. 운명의 장난이 참 얄궂다. 그는 “조국을 상대로 하는 경기는 처음이지만, 프로페셔널 지도자로 한국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벤투는 지난 4년 동안 그의 빌드업 철학을 한국 축구에 이식했고, 우루과이를 상대로 경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승리가 필요했던 가나와의 경기에서는 왼쪽 측면이 무너지며 아쉽게 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당한 항의를 하던 벤투는 퇴장까지 당했다.
12월 3일 포르투갈과의 경기 결과에 따라 벤투와 한국대표팀의 동행은 끝날 수도 있고 연장될 수도 있다. 그와 한국축구가 이번에는 웃으면서 월드컵을 마무리하길 기원한다.